『사물의 뒷모습』, 안규철, 그 너머를 바라보는 낮고 따스한 마음

무언가를 천천히 들여다볼 때면, 이전에는 마주하지 못했던 깊이를 마주하게 된다. 당연에 가로막혀, 지나쳐버리고 마는 모습들. 미술가 안규철은 일상에 매몰되어 납작해진 사물, 그 너머에 있는 깊이를 찾아 글로 풀었다. 그것은 바로 뒷모습을 바라보는 일이다. 그는 우리의 시선 속에 가려진 사물의 본디의 모습을 재발견하게 만드는 동시에, 삶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을 재고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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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안규철 작가님. 반디앤루니스 독자 여러분에게 본인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70년대에 미술대학에서 조각을 공부했고, 졸업 후 약 7년 동안 미술잡지 기자로 일했습니다. 뒤늦은 독일 유학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1995년부터 미술가로 활동하면서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에서 20여 년 동안 강의를 했습니다. 지난해에 정년퇴임을 하고 이제 다시 본업인 미술로 복귀하고 있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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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펴내신 에세이집 『사물의 뒷모습』은 어떤 책인가요?
제가 20여 년 전부터 현대문학에 짧은 글들을 연재해왔는데, 그 글들을 모은 세 번째 책이 되겠습니다. 주로 제 주변의 소소한 사물을 관찰하고 기록해두는 습관의 산물인데, 저에게는 이 글들에 담긴 생각들이 제 미술작업의 출발점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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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표지 이미지는 17년도에 열린 작가님 개인전 ‘당신만을 위한 말’에 설치된 작품 <머무는 시간>에서 따오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작품을 표지 이미지로 사용하신 데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이 그림은 원래 [어제 내린 비]라는 제목으로 이 책에 실린 글의 삽화로 그려졌습니다. 어느 여름날 폭우가 그친 뒤 집 근처 계곡의 요란한 물소리를 듣다가, 저 빗물처럼 우리도 흐르고 머물고 스며들며 한 시절을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이 사다리 끝에 올라가서 벽면의 가장 높은 곳에 나무 공을 올려놓습니다. 공은 경사로를 따라 천천히, 때로는 빠르게 굴러 내려가지만 결국에는 바닥에 닿을 것입니다. 그때까지 공이 굴러가는 짧은 시간이 우리의 삶이라면 그 시간 동안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묻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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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로서 작가님은 사물의 본성과 세계의 모순에 대한 사유를 이끄는 작업을 계속해오셨습니다. 『사물의 뒷모습』을 읽으면서 이 책 역시 그러한 작업에 일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아마 유학시절이던 90년대 초 부터였던 것 같습니다. 세상에 없던 새로운 형태를 찾는 미술가로서의 일을 내려놓고, 일상의 사물들을 관찰하고 그 안에 담겨 있는 사람들의 생각을 새롭게 발견하는 일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만들어서 쓰고 있는 물건들을 일종의 책처럼 읽고, 그것들을 일종의 단어처럼 사용해서 말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은 지금까지 저의 미술작업과 글쓰기를 이끌어온 동력이었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알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모든 것을 말하지만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지 모른다. 이것은 이 세계에 대한 우리의 경험에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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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수록된 글 “A와 B의 문제”에서 작가님은 존재의 본질에 관한 물음을 제기하고 있으십니다. A가 A이고 B가 아닌 것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계의 한계이자 모순적 운명이 아닌가 묻고 계시지요. 결국, 존재의 ‘뒷모습’이라는 것이 바로 B이자 C이고, D인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저는 철학자처럼 존재의 본질을 질문해보려는 생각은 감히 해보지 못했습니다. 어느 날 돌이켜보니 저의 시간을 지나치게 A가 A가 아닌 것을 비판하는 데만 써왔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것이 원래 내가 미술로 하려던 일이었나 하는 심각한 의문이 들었습니다. 사진작가 에두아르 부바의 사진에 미셸 투르니에가 글을 붙인 [뒷모습]이라는 책에서처럼, 사람이든 사물이든 그 뒷모습에서 우리가 간과했던 진실을 발견할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소박하게 실천해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A가 A가 되기 힘든 세상에서 A가 B나 C일 수 있다는 말은 어쩌면 한가로운 말처럼 들릴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면 예술은 세상에 할 일이 아무것도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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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님께서는 기호로 표현되는 말과 그 대상 사이의 구조에 관심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작품의 매체로서 언어를 주로 사용했다지요. 이렇듯 ‘언어’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제가 잡지기자로 7년을 일했던 것이 우선 중요한 이유가 되겠지요. 그림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이 직업이 될 줄은 생각도 못했었는데,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마치 양손잡이처럼 그림과 글을 다루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언어, 또는 서사는 오랫동안 모더니즘 미술에서 배제된 영역이었는데, 저의 관심사는 미술에서 언어를 회복하는 일, 구체적인 현실과의 관계를 복원하는 일이었습니다.
이 말없는 대화가 어느 순간 끊기고 정적의 시간이 찾아올 때,
내 안에서 천사가 지나갈 때, 사물들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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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일상의 사물 역시도 작가님 작품의 주요 매체로 사용하십니다. 『사물의 뒷모습』에서도 일상적 순간과 사물의 철학적 재발견이 두드러지는데요. “천사가 지나가는 순간”은 어떻게 마주할 수 있을까요?
글쎄요, 저도 그게 늘 궁금하지요. 대개는 뭔가에 열중해있는 중에 아무런 예고 없이 그런 순간들이 찾아옵니다. 새벽에 일어나서 노트를 펼쳐놓고 30분 동안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을 때, 이대로 끝인가 하는 조바심 속에서 잠깐 스쳐가는 섬광처럼 반짝 나타나고, 금세 종적 없이 사라지지요. 아무리 불러도 오지 않는다는 것, 기다릴 수밖에 없고 항상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 그러나 언제든 붙잡을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집요하고 호기심 많은 관찰자의 자세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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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직업이 조각가, 예술가이시죠. 예술 작품을 만드는 일과 글을 쓰는 작업은 서로 공유하고 있는 지점이 있으면서도 또 꽤나 판이할 것 같습니다. 어떻게 다를까요? 작가님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조각을 공부하면서 저는 시인들이 연필 한 자루와 수첩 한 권으로 만들어내는 작품들이 부러웠습니다. 조각은 항상 재료와 노동을 전제로 하는 작업이어서 문학보다 덜 자유롭다고 생각했어요. 혼자 책상에 앉아서 하는 글쓰기에 비하면 미술 작업은 많은 사람의 협업과 참여를 요하는 작업이라는 점도 크게 다른 점입니다. 과거에 작업실에 은둔자처럼 처박혀서 캔버스 앞에 앉아있던 미술가들에 비하면, 미술이 고도의 스펙터클을 생산하는 일종의 이벤트 산업이 되어가고 있는 지금의 미술가들에게는 훨씬 더 다양한 분야와의 협업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저에게 글쓰기가 중요한 작업이 된 데는 이런 사정들도 작용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기질적으로 조수 없이 혼자 작업하는 것이 좋고 그런 점에서 구식 미술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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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간 머무셨던 교정을 떠나, 예술가로서 새로운 발걸음을 내디디셨다 들었습니다. 돌아오는 5월에 부산에서 개인전을 여신다지요. 책의 제목과 동일한 이름의 전시회라고 알고 있는데요. 전시회에 대한 소개 부탁드립니다.
일종의 회고전이 될 것 같습니다. 약 30년 전에 첫 개인전으로 미술계에 발을 들여놓은 이래 계속 앞만 바라보고 일해 왔다면, 이제 뒤를 한 번 돌아볼 때가 되었지요. 전시를 할 때마다 신작을 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던 것 같고, 구작을 다시 내놓는 것을 부끄러운 일이라고 여겨왔는데, 이번에는 그 동안 해온 작업들 중 주요 작품을 모아서 어떤 것이 아직도 유효하고 앞으로도 남을 수 있는 작업인지, 흘러간 유행가처럼 잊힐 작업이 어떤 것인지 살펴보려 합니다. 작업의 상당부분이 전시 끝나면 폐기되는 설치미술 작품이었기 때문에, 그것들 중 몇몇을 축소모형으로 재현하기도 하고, 아쉬웠던 작품을 보완해서 새로 제작하기도 했습니다. 미술가 안규철의 지난 30년을 요약하는 전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오히려 A가 A가 아니라 B이고 C일 수도 있음을 말하는 것이야말로 원래 예술가가 하는 일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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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평론가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시인의 코기토를 ‘나는 언어를 의심한다. 고로 나는 시인이다’라는 명제에서 찾는다.” 작가님에게 있어 예술가의 코기토는 어떻게 정의될 수 있을까요?
저도 예전에 작가노트에 ‘나는 보이는 것을 의심하는 병이 있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나는 눈에 보이는 것을 의심한다. 그러므로 나는 미술가다’라고 바꿔 쓸 수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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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작가님께서 만들어내실 작품들을 기약하며, 예술가로서 어떤 지향점을 가지고 싶으신지 또는 어떤 작품을 만들고 싶으신지 궁금합니다.
작가로서의 긴장을 유지하면서 아직까지 시도해보지 못했던 일들을 탐사하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책에 썼듯이 내가 왜 아직도 은퇴를 하지 않는지를 매일같이 스스로 질문해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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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이 책을 읽으실 독자분들에게 자유롭게 한 마디 부탁드려요.
이 책은 끊임없이 흔들리는 이 세상에서 철학이든 종교든 어떤 권위든 그 어디에도 기대지 않고 균형을 잡으려는 한 사람의 조용한 기록입니다. 얼어붙은 강을 깨는 도끼와 같은 글이 되지는 못했으나, 따뜻한 온기를 전해주는 머그컵 같은 글로 읽히기를 기대해봅니다.

안규철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서 조각을 공부했다. 7년간 중앙일보 <계간미술>기자로 활동했으며, 1987년 유럽으로 건너가 프랑스 세르주퐁트와즈 국립미술학교을 거쳐 독일 슈투트가르트 국립미술대학에서 수학했다. 이후 미술가와 교육가로 활동하면서, 일상의 사물과 언어 사이의 역설을 통해 현실의 모순을 파헤치고 사물의 보이지 않는 이면을 드러내는 작업을 발표해왔다. 저서로는 『그 남자의 가방』, 『모든 것이면서 아무것도 아닌 것』, 『아홉 마리 금붕어와 먼 곳의 물』, 『사물의 뒷모습』 등이 있다.
| Editor - 황승현
h_beatrice@bnl.co.kr
사진=저자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