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쓴다』『나를 알기 위해서 쓴다』 정희진 ‘당신은 무엇을, 왜 쓰는가’

누구나 작가가 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지만, 글쓰기란 어떤 의미인지, 무엇을, 왜 써야 하는가를 고민해본 적이 있는지. 그런 고민이 들 때 권하고 싶은 책이 있다. 정희진의 글쓰기 시리즈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쓴다』 『나를 알기 위해서 쓴다』가 그것이다.
무엇을, 왜 쓰는가와 같은 질문에 대해 이 책이 내놓는 답은, “무례와 곡해와 요약의 폭력성을 무릅쓰고” 정리해보자면 이렇다. 사회적 약자가 지닐 수 있는 유일한 무기가 글쓰기이기 때문에, 나를 알아가는 과정에 글이 있기 때문에. 두껍지 않은 두 권의 책을 읽는 데에는 긴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겠다. 고통, 여성이라는 주제에 대해 그만이 쓸 수 있는 치열한 사유를 주워 담고, 그의 글에 긴장하며 삶을 대하는 태도를 다잡느라고. 또, 앞으로는 어떤 글을 어떻게 써 나갈 것인가 고민하느라고.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쓰려면, 나부터 ‘나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글을 쓰는 과정은 나의 세계관, 인간관을 찾아가는 과정이며 나를 검열하는 과정일 수밖에 없다.
-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쓴다』, 16쪽
자기 이야기를 쓴다는 것은 경험을 쓰는 것이 아니다. 경험에 대한 해석, 생각과 고통에 대한 사유를 멈추지 않는 것이다. 그 자체로 쉽지 않은 일이고, 그것을 표현한다는 것은 또 다른 형태의 산을 넘는 일이다.
- 『나를 알기 위해서 쓴다』, 247쪽

이미지 제공 = 교양인
정희진 선생님, 안녕하세요. 독자분들께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제가 인터뷰를 거의 안 하고, 잘하지도 못합니다. 하지만 서면 인터뷰는 편지 쓰는 것 같아서 좋네요. 저는 편지 쓰기를 좋아합니다. 사실, 약간 긴장하고 있습니다. 본디,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한편으로는 ‘온전한 대화’를 욕망하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제가 일방적으로 말하는 시간이니, 괜히 뭔가를 기대하는 심정입니다.
규범적으로 제 소개를 하면, 다학제적 관점에서 여성주의를 공부하는 사람입니다. 혹 여성학에 대한 선입견이 있으시다면, 저희 집에 오세요. (웃음) 여성학 책보다 심리학, 지리학, 의학, 군사학, 문학 관련 책이 훨씬 많습니다. 강사료와 원고료, 운이 좋으면 인세로 생계를 유지하는 비정규직 노동자입니다.
‘정희진의 글쓰기’ 시리즈로 두 권의 책을 출간하셨지요. 출간 소감을 여쭙습니다.
소감 같은 것은…… 그다지 없습니다. 책을 낼 때마다 출판사에게 손해가 될까, 그게 가장 걱정이고, ‘정확히’ 읽어주시는 독자가 있으면 행복하죠. 저는 지난 15년동안 한 출판사하고만 일을 했는데요, 특히 이번 책은 출판사가 숙주라면, 저는 기식자(寄食者, ‘기생충’)였습니다. 무임승차 혹은 수저만 올렸다고나 할까요. 원래 편집자는 공동 저자입니다. 저는 좋은 동료 작가(편집자)를 만난 운이 좋은 사람입니다.
선생님께서 책을 고르고, 읽고, 기억하고, 기록하는 과정이 궁금합니다.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나요?
꾸준히 읽는 저자는 한국의 소설가 정찬, 일본의 학자 도미야마 이치로, 미국의 실존주의 심리학자 어빈 얄롬입니다. 이들의 사고방식을 배우려고 노력합니다(써놓고 보니, 모두 남성이라 ‘찝찝하네요’). 이들의 책은 신간은 물론이고, 예전 책도 반복해서 읽습니다. 여성주의 관련 서적은 장애, 퀴어, 한국 현대사와 연관된 책을 주로 읽습니다. 여성주의자로는 주디스 버틀러와 캐롤 길리건의 패러다임을 동시에 좋아합니다.
책을 고르는 기준은 ‘숨어 있는 책’입니다. 이런 책들은, 주로 다른 책의 참고 문헌에서 발견합니다. 제가 모르는 분야의 책이나 지적 자극을 주는 책을 읽습니다. 이런 책들이 ‘가성비’가 좋은 책이죠.
예전에는 필사를 많이 했는데, 지금은 메모만 합니다. 아시겠지만, 메모하려면 집중해서 책을 읽을 수가 없죠. 저는 모든 영화를 두 번 보는데, 한 번은 편하게 즐기고 한 번은 좋은 대사를 적느라고요. 이렇게 쓰니까 제가 책을 많이 읽는 것 같은데, 딱히 그렇지도 않아요. 책보다는 문구류와 과자를 더 좋아합니다. (웃음)
한 가지 첨언하면, 제가 출간한 책(『정희진처럼 읽기』와 이번 책 두 권)에 소개된 책들을 보고 “그중에서 몇 편 밖에 못 읽었다.”고 하시는 독자 분들이 많은데, 이것은 ‘잘못된’ 말입니다. 저도 남들이 읽은 책하고 겹치는 책이 거의 없어요. 어떤 분이 ‘서평집’을 냈다면, 거기서 다룬 책 중에서 제가 읽은 책은 거의 없어요. 아, 참, 저는 위 세 권의 책이 서평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를 알기 위해서 쓴다』라는 제목처럼, 우리가 글을 쓰는 이유는 스스로를 알기 위해서일까요? 자신을 알고 나면 삶은 어떻게 달라지나요?
‘나를 알기 위해서 쓴다’보다는 ‘나를 알아야 쓴다’가 더 정확한 말일 겁니다. 나를 아는 일도, 사실은 불가능해요. 코엔 형제의 ‘그 남자는 거기에 없었다’라는 영화가 있는데, 이런 대사가 나와요. “현실을 변화시키려면 현실을 알아야 하는데, 아는 것도 불가능하다. 현실이 계속 이동하기 때문이다.”
결국 나를 알기 위해 쓰는 것도 어렵고, 나를 알아도 쓰는 것이 어렵다는 것이죠. 모두 과정인 셈이죠. 모든 인식은 사회적 개인(social body)인 ‘나’를 거칩니다. 우리의 몸 자체가 렌즈죠. 그렇기 때문에 세상(인식 대상)을 알기 위해서는, 인식자인 자신을 아는 것이 전제이자, 기본이죠. 요즘 제가 트로트 프로그램을 많이 보는데, 심사를 하는 가수 장윤정씨가 그러더군요. “자기가 무슨 노래를 부르는지 모르는 가수가 태반”이라고요. 너무 공감했어요. 글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저를 포함해, 자신을 아는 것은 고사하고 자기가 무슨 글을 쓰는지 모르는 이들이 대부분이죠.
“글쓰기와 관련하여 가장 괴로운 경우 두 가지”(『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쓴다』, 12쪽)에 대해서도 말씀하셨지요. 무지와 싸워야 할 때, 선생님의 글이 다른 이들의 글과 비슷하다는 평을 들을 때. 이런 때에는 어떻게 하시는지 궁금합니다.
통념처럼, 무지의 반대는 앎이 아닙니다. 앎은 학력(學力), 학력(學歷), 학벌과 무관합니다. 개인의 무지는 나라(국가)도 구제 못합니다. 무지는 강제든 자발이든 권력이니까요. “모르는 게 약이다.” “아는 게 독이다.” 이런 말들을 보면,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어요. 모든 지식이 다 ‘좋거나 바람직하지 않다’는 진리를. ‘知’와 ‘無知’의 기준은 권력이 정합니다. 정말, 무지는 대책이 없어요. 왜냐면, 싸울 수가 없거든요.
모든 독자는 글에 대한 자기만의 판단을 가지고 있습니다. 판단이 꼭 위계를 의미하지는 않지만, 공동체에 좋지 않은 영향을 주는 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극단적인 경우, ‘가짜 뉴스’나 트럼프의 언설 같은 것이죠. 제 입장에서는 저와 반대되는 입장이거나 비호감인 글, 심지어 막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글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일부 독자나 편집자들이 제가 ‘싸워야 할 글’(즉, 제가 아주 싫어하는 글)과 제 글이 비슷하다면서, 공저나 협업 제안이 들어오는 경우가 있어요. 많아요. 어떻게 대처하냐고요? 정중한 거절의 편지를 쓰고 나서, 열 받아서 폭식을 합니다. (웃음) 절망감…….
누구나 동일시하고 싶은 사람이 있잖아요. 그런데 생각해보세요,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사람과 닮았다고 하면, “여기가 어딘가, 내가 뭐하고 살고 있나”를 되물으며 당연히 괴롭지 않을까요?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으로는 ‘나’를 알기 힘들다. 이 질문은 “나는 어디에 서 있는가?”라는 탐구로 바뀌어야 한다. (『나를 알기 위해서 쓴다』, 14쪽)고 하셨어요. 나는 어디에 서 있는가, 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이 문제를 흔히 ‘포지션(위치성)’이라고 하지요. 사회, 정확히 말해, 내가 속한 사회의 언어 없이 ‘나’를 알 수 없습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일단, 갈등이 생깁니다. 거의 모든 사회적 갈등과 개인의 고뇌는 내가 생각하는 ‘나’와 타인이 생각하는 ‘나’가 다르기 때문이죠.
현장(로컬)에서, 구체적 인간관계에서, 나의 행위에 따라 나는 변화합니다. 내가 행위하고 있는 사회적 장소, 위치에 따라 나는 각각 다른 사람입니다. 이는 자기 결정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자신을 특정한 사람으로 포지셔닝하는 것이죠. 제가 남성과의 관계에서는 ‘여성’이지만 젊은 여성과의 대비에서는 ‘아줌마’이고, 서울 토박이라는 점에서는 문화적 기득권자일 수도 있고, 학자와 작가를 구분한다면 저는 그 경계를 깨고 싶고…….
여성이라도 딸, 여성(개인), 아들을 둔 학부모…… 이런 위치에 따라 사람은 다른 태도를 갖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알기 위해서는 자신이 속한 사회와 ‘지금, 여기’서 맺고 있는 관계성을 고민해야지요. 시간 강사로 일할 때 저는 페미니스트보다 ‘교육자’ 정체성이 우선으로 생각합니다. 남학생들도 자신을 남성이기 이전에 ‘학생’으로서 자세를 갖기를 바라지요. 이처럼 위치성에 대한 고민은 글쓰기뿐만 아니라 삶 자체에서 대단히 중요한 이슈입니다. 자기 위치와 그 위치에 영향을 미치는 권력 관계는 인식하기를 멈추지 않는 것!
두 책에는 우리 사회에서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키워드, ‘세월호’와 ‘여성주의’가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이 두 가지를 계속해서 쓰시는 이유는 무엇인지, 계속하게 하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지 궁금합니다.
사실 저도 이번에 알았어요. 제가 세월호에 대해 이렇게 많이(?) 쓴 줄 몰랐거든요. “힘”이라기보다 쓰고 싶은 이야기니까, 저절로(?) 그렇게 된 듯해요. 개인적으로 저의 근원적인 관심사는 인간의 고통입니다. 필연적인 삶의 고통. 생로병사와 연관된 지식, 권력, 글쓰기의 윤리. 제가 핸드폰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유일한 연락 수단이 전자우편이라 매일 포털 사이트에 들어가는데, 시작 화면 같은 데 ‘미아 찾기’가 나오잖아요. “3세 실종, 현재 20대 추정” 이런 공공 광고 있잖아요. 만일, 여아면 더 가슴이 아프죠. 그 아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 부모들은 어떻게 살까 생각으로 하루를 보낼 때도 있어요. 타인의 고통에 대한 지나친 거리두기와 지나친 동일시, 둘 다 문제인데 저는 후자예요. 저도 평생 안고 가야할 문제(question)가 있고, 제 문제를 탐구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냅니다.
여성주의는 이슈나 주제가 아닙니다. 여성주의는 수많은 인식론 중 하나인데, 가장 포괄적인 사유라는 점은 누구나(?) 인정합니다. 간단히 말해, 젠더와 무관한 사회 문제는 없고 어느 그룹의 인구에나 여성은 있으니까요. “여성주의에 특별한 관심이 있다?” 이런 표현은 제게 좀 어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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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자로서 ‘품위 있게’ 싸우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무기를 가져야 한다고 하셨어요. 선생님의 무기는 글쓰기였고요. 각자의 무기, 목소리는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요? 모두에게 글쓰기가 가장 갖기 쉬운 무기일까요? 자신만의 언어는 어떻게 획득할 수 있을까요?
누구나 억울하고 분할 때가 있잖아요? 분노는 감정이 아니라 인식입니다. 그 인식이 맞든 틀리든 간에. 예를 들면 전두환 씨도 본인 스스로를 억울한 피해자라고 생각하고 있잖아요? 제가 성폭력, 아내 폭력 가해자를 상담할 때 보면, 이들의 분노는 정말 어마어마해요.
분노나 억울함의 정당성을 가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전쟁이 나죠. 문제는 어떤 사람의 분노(‘갑’)는 이해받고 수용되는 반면, 어떤 사람들은 분노의 표현조차 금기시되죠. ‘이데올로기’가 바로 이 문제와 관련한 담론이죠. 모든 언어는 당파적입니다. ‘을’에게는 대변자는커녕, 자기 언어가 없습니다. 한국인들 중 영어 스트레스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그러나 미국인이 한국어 때문에 평생 스트레스에 시달리나요?
억압받는 사람은 자신의 처지를 고민할 수밖에 없지만, 타인을 억압하는 사람은 자신에 대해 알 필요가 없고 따라서 자신을 해방시킬 수 없습니다. 남성이든 이성애자든 백인이든 비장애인이든 ‘주류’는 자신을 설명할 필요가 없어요. 기득권자는 외부에서 문제 제기가 들어올 때(만), 자신에 대해 질문을 갖습니다. 기존의 언어가 자기 삶을 정상화시켜주니까요. 특별한 사건이 없는 한, 세상이 잘 굴러가는 것 같죠. 하지만, 주변인은 주류에 비해 자원이 없어요. 최근 ‘n번방’ 사건을 보면, 극소수의 남성이 여성 집단 전체를 억압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죠. 남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는 백인도 마찬가지지요. 일본이나 미국의 인종주의자들이 타국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보세요.
‘품위 있게 싸우기’는 지향이 아니라 필연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누구나 고통이 있어야, 생각을 하거든요. 사유는 억압받는 자의 삶의 조건이고, 이러한 상황은 글쓰기의 가장 큰 자원입니다. 약자의 언어를 강자가 못 알아들을 때, 권력자는 그 때만 당황합니다. 약자의 목소리, 다른 목소리가 소중한 것은 그 자체로 옳기 때문이 아니라 기존의 목소리를 상대화시키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맨스플레인을 하는 남성과 논쟁은 불가능합니다. “그건 당신 생각일 뿐이죠”라고 하면 그만이죠. 여성들끼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계급, 인종, 신분 차이가 있죠. 점차 격화되고 있습니다. 젠더를 떠나 부패하고 타락한 사람이 있을 수 있죠. 그런데, 그들은 돈과 남성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어요. 언어 자체가 무기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자원이 없는 여성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무기가 언어라는 것이죠.
많은 독자들이 선생님의 글을 필사하고, 의지하여 살아갑니다. 그런 선생님께서도 글을 쓸 때 스트레스를 받고, 어려움을 겪으신다는 점이 또 한 차례 위로와 용기가 됐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글 쓸 때의 두려움과 부끄러움, 슬럼프를 어떻게 견디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의지”까지야…… 민망하네요. 저의 경우, 삶은 언제나 슬럼프지만 글쓰기에서는 그다지……. 슬럼프는 적은 것 같습니다. 아마 하고 싶은 말이 많아서 그런 것 같습니다. 글은 매일 씁니다. 사실, 제가 친구들에게 ‘일반인 퀴어’라고 불릴 정도로, 일상생활이 ‘일반적이지는’ 않습니다. 일단 생계를 위한 강의 외에는 외출을 하지 않고, 모임에 나가지 않고, ‘전혀’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사람을 만나지 않습니다. 식비가 지출의 전부일 정도로 생활이 단순합니다. 제 또래 여성들에 비해서는 성역할 노동도 별로 없고요. 한마디로, 시간이 많다는 얘기죠. (웃음) 덕분에 미완성 글, 미발표 글이 많습니다. 물론, 퇴고나 윤문 과정에서 완전히 다시 쓰기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미완성’은 글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글인가에 따라 다르겠지만 글을 ‘쉽게’ 쓰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제 캐릭터와도 연관이 있겠지만, 퇴고 전에는 제 글을 여러 번 보는 편인데 일단 세상에 내보낸 글은 다시 읽지 않습니다. 부끄럽고 민망하고 기억하고 싶지 않아요. 제 말에 넘어갈 독자도 없겠지만 혹세무민하는 느낌? 발가벗은 느낌, 타인에게 사기 친 느낌? 기본적으로 오탈자도 많고. 아, 죽고 싶죠. 아무리 퇴고를 해도 문제가 생겨요.
어떤 소설가는 자기 글을 토할 때까지 그리고 그 토사물을 다시 먹을 수 있을 때까지 ‘체크’를 한다고 하더군요. 저는 그 전에 지쳐서 그냥 저 자신과 타협하는 편입니다. 저는 치열하지 못합니다. 그런 면에서 ‘작가’의 가장 중요한 조건은 ‘머리’가 아니라 체력이에요. 인내심, 자신과의 승부욕, 지루함을 견디는 능력이 필수적입니다.
두려움은 말할 것도 없죠. 저의 무지, 판단 착오, 제가 알지 못하는 세계가 얼마나 넓겠습니까. 우주 속에서 헤매는 제 모습이 보입니다. 저의 무식으로 인해 상처받고 불쾌한 독자가 있다면, 제 무의식이 드러났는데 그걸 의식하지 못한다면……. 물론 실질적으로는, 댓글이나 트위터의 ‘조리 돌림’에 대한 두려움도 있습니다. 많이 있어요. 말이 되는 비판은 저도 즐겁고 성장하는 느낌인데, 그렇지 않을 경우가 더 많지요.
“모든 독자를 배려하는 글쓰기는 불가능하거나 사기다.”(『나를 알기 위해서 쓴다』, 59쪽)고 하셨지요. 베스트셀러 위주로 독자의 선택을 유도하기 쉬운 출판 생태계, 선생님께서는 어떤 독자를 기다리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사람마다 삶이 다른데 어떻게 객관적, 보편적, 중립적인 책이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베스트셀러나 이른바 ‘고전’은 인간관계 때문에 생긴 현상이라고 봅니다. “나도 그 책을 읽었다, 내용을 안다.”는 거죠.
사실, 저는 개인적으로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이 출간되었을 때 상당한 충격을 받았어요. 일단, 이 제목 자체로 책 한 권 분량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적 대화란 무엇인가? 아니, 왜 필요한가? 저는 ‘넓고 얕은 지식’이 무슨 뜻인지를 모르겠어요. 정말요. 한마디로 이 시대 독자의 요구를 조직하고 주도한 제목인데, 제 생각에는 ‘책, 독서, 사유’에 대한 모든 오해를 함축하고 있는 ‘좋은 사례’라고 봅니다. 지성은 사유하는 방식이지, 정보나 학식이 아니거든요.
온라인 서점의 등장은 인쇄술의 발전만큼이나 문명사에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온라인 서점은 일단 폐가식이에요. 독자가 책을 선택하기 어렵습니다. 독자는 ‘주어진 환경 안에’ 있는 거죠. 이 자체가 연구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거대한 그물망에서, 스스로 ‘선택’하고 있다고 착각하며 사는 거죠. 저는 촛불 시위나 정부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출판 종사자와 독자가 세상을 바꾼다고 생각합니다. 독자가 똑똑하거나 정의롭거나, 최소한 다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온라인 시장 이전에는 작가가 글을 썼는데 지금은 시장 질서가 기획한 책이 나옵니다. 책이 탄생하는 경로가 완전히 달라졌어요.
그 사회에서 어떤 책이 주로 팔리고 읽히는가는 공동체의 생사를 좌우하는 중대한 문제입니다. 저는 편집자는 최고의 지식인이어야 하고, 사회는 그들의 안목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편집은 저작입니다. 공동 저자, 리라이팅(re-writing)이죠. 한국사회에서도 일부(?) 갑질 필자가 있죠. 편집자와 저자의 위상이 바뀌어야 합니다.
최근 몇 년간 자기 이야기, 생애사, 구술사 등을 다룬 책이 그야말로 봇물 터지듯 나왔습니다. 물론, 수험서나 재산 증식 안내서와는 비교할 수 없는 비율이지만요. 이른바 소수자나 ‘민중’을 대상화·타자화하면서 글쓴이가 자기도취와 자기연민, 피해자주의에 빠진 글을 자주 봅니다. 이런 글은 매우 위험합니다. 요약하면, 남성 작가들의 허세, 여성 작가들의 공주병. 좌파, 여성주의 모두 예외가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김소민 작가의 문체를 좋아합니다. 그의 『가끔 사는 게 창피하다』, 그리고 박희정 작가 등이 함께 쓴 『나를 보라, 있는 그대로』, 『나는 숨지 않는다』를 권합니다. 경험은 겪은 것이 아닙니다. 과거를 선택적으로 기억하는 거죠. 그 선택에는 당연히 (독자가 좋아하는) 정치학이 개입합니다.
글쓰기가 생계가 되면 시장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그 사회가 원하는 정치적 편향, 유행…… 사회가 수용하지 못하는 이야기는 가시화되기 어렵습니다. 제주 4·3사건이나 과거 진보 진영 내의 성폭력이 대표적인 예죠. ‘국가보안법’은 북한에만 적용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숨겨진 문제, 그리고 가시화 과정의 선택, 이는 글쓰기가 왜 정치학일 수밖에 없는가를 보여줍니다.
글쓰기를 시작할 때 쉽게 범하는 것이 타자화인 것 같습니다. “나는 저들과는 다르다, 이것에서 무엇을 배웠다” 라는 생각. 마음속으로 타인과 나를 비교하는 것이 습관이 됐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여기서 벗어나려면, 어떤 접근이 필요할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인류가 망한다면 에고(자아)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여성주의는 남성이 쓴 여성을 여성 자신이 쓰겠다, 이제까지 타인(지배자)이 나를 규정해 왔다면 지금부터는 내가 나를 규정하겠다, 이런 탈식민의식에서 출발했죠. 그런데, 곧바로 문제가 생깁니다. 내가 나를 쓰는 작업, 소수자가 소수자를 쓰는 작업에는 오류가 없을까요? 투명하고 올바른 언어는 없습니다. 남성은 말할 것도 없고 여성이나 여성주의 작가들 중에서도 “나 이런 사람이야.”라는 의식으로 도배된 글을 종종 봅니다. 이제까지 자존감과 인권을 억압당해 온 이들이 자신의 권리를 자각하고, 이를 글로 표현하는 상황은 중요한 진전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피해자의 목소리라고 해서 옳거나 정의롭거나 저절로 도덕성을 획득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이 일단 언어를 다루면 장르나 ‘수준’에 상관없이 자신이 대단하다는 (무)의식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문자’에 대한 숭배랄까, 허위의식이 있죠. 실제로 저는 그런 사람도 아니지만, 저는 스스로를 ‘작가, 학자, 지식인’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제 소개도 그냥 “여성학 강사”라고 해 왔어요. 자신이 특별하다는 생각은 위험하기도 하지만 타인이나 자연의 관점에서 보면 어리석고 우스꽝스러운(ridiculous) 것입니다. 코로나 사태에서 보듯이,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존재는 미생물과 곤충입니다. 인간 외부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은 재앙일 뿐이죠.
한국의 군 위안부 운동에 대한 강력한 문제제기인 재일교포 여성 박수남 감독의 ‘침묵’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팔순의 박수남 감독은 “영화 ‘침묵’은 재일조선인으로 살아오시면서 차별받으셨던 이야기, 그 마이너리티의 이야기가 다른 마이너리티와 연대하는 이야기인 거죠?”라는 질문을 받자, 즉각적이고 단호하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니라요! 소수자는 또 다른 소수자를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구조 속에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연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즘 우리 사회에는 타인을 대할 때 상반된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공감’, ‘이해’이라는 말을 뱉기 쉬워졌고,(SNS의 ‘좋아요’ 버튼 이름도 ‘공감’이지요) 반대로 타인의 고통에 무뎌지고 있고요. 왜 그렇게 되어 가고 있는 걸까요?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보시는지 궁금합니다.
일단, 공감과 이해는 불가능하거나 대단히 지적이고 도덕적인 행위입니다. 여성주의 정신분석학에서는 공감(em/pathy)을 인간의 능력 중에서 가장 고도의 훈련과 학습이 요구되는 자질이라고 봅니다. 인간 몸의 개체성·개별성은,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기 어려운 ‘생물학적’ 환경에 있지요. 또한 공감이나 이해는 그 행위 특성상 지속적으로 발생할 수 없습니다. 어느 한 순간에 공감 현상이 발생하지요. 우리는 그 순간을 못 잊어합니다.
여러 사람들이 지적했듯이, 매체의 발달이 가장 큰 원인이 아닐까요? 호모 파베르, 즉 도구(매체)를 만들수록 인간의 자아는 비대해집니다. 큰 차, 큰 아파트, 온라인에서의 영향력이 곧 자기 자신이라고 믿게 되는 거죠. 이 분야의 고전 마셜 매클루언의 『미디어의 이해』의 부제가 흥미롭죠. 인간의 확장(extension of men)이거든요. ‘탈감정사회(the postemotional society)’는 감정이 메마른 사회가 아니라 유사(類似) 감정 사회라는 의미입니다. ‘가짜’ 감정이 판치는 사회라는 거죠. 그래서 매체, 도구가 발전할수록 소통은 어려워지고 우리는 외로워집니다. 자신이 외롭다고 생각하시는 독자가 있다면, 그것은 자본의 폭주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앞으로 외로움(loneliness)은 기존의 소외(alienation) 개념과 다른 차원에서, 인류에게 큰 과제가 될 것입니다.
‘몸으로 글을 쓰라’는 것, ‘삶에서 글이 나온다’ 라는 말씀에 대해 여쭙고 싶습니다. 개인적으로 제 삶에서 할 수 있는 이야기는 너무 작고 얕은 것이 아닌가 종종 고민합니다. 늘 그 언저리에서 반복하는 것 같아 좌절하기도 하고요. 작고 하찮게 보이는 글을, 깊고 넓은 글로 키워나갈 방법이 있을까요?
세상에 “작고 하찮은 문제”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보이는 시각이 있을 뿐이죠. 제 생각엔, 고통이 너무 없으면 뇌에 자극이 없고, 고통이 너무 많으면 인간의 몸이 고통의 통증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아프죠. 자살이 바로 질병사인 이유이지요. 작가나 영화감독이 이런 말을 합니다. 어떤 사회/사람은 너무 복잡하고 ‘문제가 많아서’ 들여만 봐도 작품이 된다고요.
재가 종종 받는 질문이 “사회운동의 정의를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인데, 이는 “예술, 글쓰기란 무엇일까요?”와도 통하지 않나 싶습니다. 저는 이 질문에 “복잡한 현실을 더욱 복합하게 설명하려는 무모하고 실패하기 쉬운 시도”라고 답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현실을 단순하게 개념화하려고 하죠. 이것이 이게 속도의 시대, 사유하지 않는 시대에 어울리는 삶, 바로 폭력이죠. 최근 몇 년간 우리 사회에 만연한 혐오 현상이 대표적이죠. ‘혐오’는 일단 단순합니다.
질문하신 내용에 ‘직답’을 드린다면, 자신이 관심 있는 분야에서 시작해서 고민을 ‘미시’에서 ‘거시’로 확장해 나가시기를. 저는 우울증, 질병, 중독에 관심이 많아요. 그래서 그런 분야의 책을 읽다보면 몸의 차이, 의학사, 신자유주의, 현상학, 정상성, 장애와 인종 문제까지 모두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러한 방법은 다른 공부에도 효과적입니다. 철저히 자기 관심사로부터 시작하는 거죠.
선생님의 글을 읽으면서 많이 괴로웠습니다. 나는 그렇게 살고 있는가(혹은 그렇게 살고 있지는 않는가) 라는 반성을 끊임없이 했고, 과거의 미성숙했던 모습을 계속 떠올려야 했습니다. 기억해야 하는 문장, 읽어야 하는 책을 너무 많이 발견하기도 했고요. 선생님께서도 저와 같은 과정을 겪으셨나요? 이 시기를 어떻게 보내셨는지 궁금했습니다.
저는 인생의 매 순간, 자존심이 바닥을 칩니다. 구체적인 내용을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하지만, 늘 머릿속에서 잡념이 떠나지 않아요. 너무 괴로워서 활자가 눈에 안 들어올 때도 많습니다. 인생의 시간이 슬픔과 외로움 분노, 자책, 비참함으로 메워집니다. 저는 인생을 즐길 줄 아는 능력자는 아니에요. 그런 분들 부럽습니다.
지금도 제 인생 진로를 결정하지 못해서, 하루의 대부분을 이 고민으로 보냅니다. 인간은 죽을 때까지 방황하는 존재인 것 같습니다.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는 말을 믿습니다. ‘이생망’, 흑역사, 부끄러움. 이 세 단어가 제 삶을 요약합니다. 제 과거? 얼마나 황당하고 어리석었는지 아마 믿지 못하실 겁니다.
괴로울 때 ‘달리기’를 하면 좋겠지만, 저는 그런 훌륭한 인간이 아니고 그냥 감기약 먹고 자거나 아마존, 한국의 온라인 서점 사이트에서 책 검색으로 시간을 죽입니다. 고민스러운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가, 중요한 인생 문제입니다. 저는 주로 회피하는 것 같습니다.
다음으로 준비 중이신 책에 대해서 들어볼 수 있을까요?
제가 좋은 말로 하면 호기심이 많고, 실제로는 변덕이 있는 편입니다. 꼭 해야 할 작업을 하다가도 새로운 관심사가 생기면 갑자기 엉뚱한 데서 놀고(?) 있는 저 자신을 발견합니다. 끄적거린 미완성 글들이야 많죠. 그러나 그것들은 절대로 책이 되지는 않습니다. 저는 지키지 못할 거짓말을 잘하는 사람입니다. 공약(空約)일 확률이 백 퍼센트죠. 일단, 신자유주의 문화와 우울증에 대한 글을 10년 넘게 붙잡고 있는데, 제 ‘사연 팔이’가 될까 봐 진전이 없네요. ‘평화학 입문’이 다음 책이 될 지도 모르겠고, 이태준의 『문장강화』 같은 전통적인(?) 글쓰기 책, 글쓰기에 대한 기본적인 주제를 다룬 ‘첫 발자욱’용 글쓰기 책을 쓰고 싶어요. 많이 팔아서 은둔 자금을 마련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웃음)
마지막으로 인터뷰를 읽고 있을 독자분들께 자유롭게 한 마디 부탁드립니다.
이 글을 읽는 동안 즐거우셨기를. 고맙습니다.
정희진
여성학 연구자. 융합 글쓰기/인문학 강사. 다학제적 관점에서 공부와 글쓰기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서강대학교에서 종교학과 사회학을 공부했고,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여성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삶의 어떤 순간과 동일시할 수 있는 책 앞에서 오래 머물고 싶은 독자이자, 글쓰기의 윤리와 두려움을 잊지 않는 필자이기를 소망한다. 『페미니즘의 도전』, 『정희진처럼 읽기』, 『아주 친밀한 폭력』, 『낯선 시선』, 『혼자서 본 영화』를 썼으며, 『양성평등에 반대한다』, 『미투의 정치학』 등의 편저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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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ditor - 조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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