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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서 만난 사람

『목소리를 드릴게요』 정세랑 ‘더 나은 세계를 상상하는 일’



강렬한 분홍색의 표지를 열면, 첫 번째로 실린 단편의 첫 문장이 퐁 솟아오른다. “손가락이 사라지는 아이를 좋아해본 적 있니?” 이토록 빨려드는 첫 문장을 본 적 있던가? 이 첫 문장은 8편의 단편이 담긴 소설집 『목소리를 드릴게요』의 성격을 그대로 보여준다. ‘정세랑 월드’에서는 손가락이 사라지는 환상이 벌어지고, 하지만 그런 세계에도 ‘아이’는 살고 있고, 그 아이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어서, 인물은 독자를 향해 친절히 말을 건넨다. 너도 누군가를 좋아해본 적 있니? 하고.


누군가의 사랑을 받는 사람과 누군가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살아가는 세계. 그렇기에 더 나은 미래를 기대할 수 있는 세계를 그리는 작가 정세랑과 『목소리를 드릴게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반갑습니다, 정세랑 작가님. 반디앤루니스 독자님들께 간단한 자기소개를 부탁드려요.


안녕하세요? 소설가 정세랑입니다. 여덟 번째 책, 『목소리를 드릴게요』로 인사드립니다. 2020년에 어울리는 SF 소설집이 아닐까 싶어요.


『목소리를 드릴게요』 출간 이후 한 달여가 지났습니다. 요즘은 어떻게 지내고 계신가요?


3월에 새 장편을 연재할 계획이라 열심히 준비하고 있어요. 천천히 시간을 통으로 쓰며 긴 프로젝트를 하는 한 해를 보내려고 합니다.


예약판매만으로 2쇄를 찍었고, 독자로부터의 반응도 열렬합니다. 작가로서 체감하시는지요.


길게 사랑받는 책이 되었으면 하는 게 언제나의 바람인데, 많이 판매가 될수록 책의 수명에 보탬이 되더라고요. 그런 면에서 소장해주시는 분들께 감사할 뿐이에요. 종이책이든 전자책이든 곁에 두고 자주 펼쳐주시는 분들이 사주시는 게 아닐까 짐작하고 있어요.



(이미지 제공=아작)



이제는 정세랑의 작품을 말할 때 ‘정세랑 월드’라는 말을 빼놓을 수가 없는데요. ‘정세랑 월드’라는 표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처음 써주신 분이 어느 분인지 궁금해요. 아마도 독자분이 먼저고, 그다음에 편집자분들이 받아 적어주신 것 같은데 너무나 마음에 드는 말입니다. 그 말이 나오기 전에 제 소설은 언제나 ‘귀엽다’ ‘아기자기하다’ 같은 평가를 받았는데, 그런 평가도 싫지 않지만 시간과 공간을 큼직큼직하게 쓰는 특성은 담아내지 못한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월드’가 붙으니까 광활한 면이라 할지, 그런 면이 잘 드러나서 기뻐요. 어느 분인지 몰라도 내내 행복한 2020년 되시길요!


2010년부터 2018년까지 쓴 SF 소설을 모은 책이에요. 책으로 엮는 과정에서 과거 작품은 어느 정도 교정을 보셨을 것 같은데요. 어떤 점에 주안을 두고 고치셨나요?


특정 성별, 특정 직업, 특정 세대에 대한 진부한 표현들을 많이 삭제했습니다. 주인공들의 성격이 유연하고 열려 있도록, 수동적이거나 패배주의적이 되지는 않도록 바꾼 부분들도 있고요. 자기 삶을 너무 쉽게 놓아버리지 않게, 자기 욕망에 더 솔직하게 조금씩 다듬었죠. 작품을 쓰던 시기에 비해 제가 덜 고립되어 있고, 세상이 더디게라도 나아간다는 걸 믿게 되어서 그런 면이 반영된 것 같아요.


하지만 해결책은 항상 미래에 있잖아.

_「미싱 핑거와 점핑 걸의 대모험」, 13p


장르를 넘나드는 글쓰기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작품에서나 ‘정세랑 월드’의 색깔이 보이는 것 같아요. 작가님 본인으로서는 SF소설을 쓸 때에 판타지 소설이나 주류 문학을 쓸 때와 다르게 갖는 자세나 온도가 있을까요?


주제와 소재에 따라 장르적으로 접근할지, 리얼리즘적으로 접근할지 판단하는 편이에요. 약간 떨어져서 환상적인 코팅을 하는 게 어울리는 이야기가 있고, 아주 밀착해서 아무것도 가리지 않고 하는 게 나은 이야기가 있어요. 장르 소설을 쓸 때는 현실을 압축한 모형을 다루는 것에 가까우니까 더 과감해지긴 합니다.


전체적으로 인물을 아주 따뜻하게 그린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피프티 피플』의 「임대열」편처럼 아무리 나쁜 인물일지라도 모나게 그리지 않고, 『목소리를 드릴게요』에서는 섬뜩한 멸망을 이야기할 때에도 건강한 인물들이 재치 있게 행동하고요. 작가님의 인간관에 대해서도 듣고 싶습니다.


임대열은 제가 힘껏 모나게 그린 건데, 그야말로 모두 비웃기만 하고 아무도 이입하지 말아줬으면 하는 캐릭터였는데 임대열마저 따뜻하게 그렸다고들 하시더라고요. 제 실패입니다! (웃음) 저는 인류가 정말 특이한 종이라고 생각해요. 한없이 이기적이고 한없이 이타적이라서요. 그 복합적인 면에 끌려서 계속 사람들에 대해 쓰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존엄이란 게 가지런한 머리카락 따위로 지켜지는 것은 아닐 것 같고 어쩌면 허영심일지도 모르겠다. 모든 것이 부패해가는 세상에 뭐 하나만 직선으로 남기를 바라는 마음은…….

_「메달리스트의 좀비 시대」, 235~236p


‘극단적인 환경주의자’라는 표현을 자주 들으신다고요. 실제 작가님의 삶에서 어떤 식으로 실천하고 계신지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습니다. 혹시 일상에서도 지렁이를 만날 때 친절하게 대하려고 하는 편이신가요?


비 오는 날 만나는 지렁이들 반가워했거든요. 그런데 비가 좋아서 올라오는 게 아니라 익사하지 않으려고 올라오는 거더라고요. 도로의 지렁이를 화단으로 자주 옮겨주긴 하는데 굴이 다 침수되어서 어쩌나 싶어요.


기후 위기가 두렵고 생물 종 다양성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작은 노력들을 하고 있습니다. 환경주의는 그간 극단적인 이상주의로 오해받았지만, 사실 이 시대의 실용주의가 아닐까 해요. 제로 웨이스트*로 살려고 노력하는 편이에요. 꼭 필요한 물건은 새 물건을 사기보다는 중고를 먼저 찾아봐요. 중고거래 앱이 다양해져서 편해졌지요. 중고로 구하기 어려우면 환경에 영향을 덜 끼치는 방식으로 생산된 물건을 우선하고 나중에 재활용이 잘될 것 같은지도 따져봅니다. 여러 소재로 된 것보다는 하나의 소재로 된 걸로 고르는 거죠. 에너지를 덜 쓰고, 동물성 식품 소비를 줄이고, 환경단체에 기부도 하고 개인으로 할 수 있는 여러 가지를 하지만 정부나 기업 단위에서 더 큰 변화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제로 웨이스트Zero waste : 폐기물 제로 캠페인. 자원을 재활용하여 쓰레기를 만들지 않는 움직임을 말한다.


책에 실린 8개의 ‘정세랑 월드’ 중 작가님께서 가장 놀러 가보고 싶은 세계는 무엇인가요?


일단 절대 가고 싶지 않은 세계는 「리틀 베이비블루 필」과 「메달리스트의 좀비 시대」 쪽이니 빼고요. 「7교시」나 「리셋」의 후반부 세계에는 가보고 싶습니다. 미래의 인류가 덜 파괴적인 삶을 살게 되리란 걸 확신할 수 있었으면 해요. 인터넷 문화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목소리를 드릴게요」의 수용소에 일시적으로 머물며 인터넷 디톡스도 하고 싶고요.


두려움을 원료로 인류는 다음 단계로 나아갔다. 지렁이들이 다다르지 않았던 땅 깊은 곳에 도시를 지었고, 지열 발전으로 에너지를 만들어냈고, 어떤 쓰레기도 도시 밖으로 내보내지 않았다. (…) 지렁이들이 오기 전보다는 분명 덜 폭력적인 문명이고, 어쨌든 병원도 학교도 있으니 리셋이 모든 걸 리셋한 건 아니어서 다행이다.

_「리셋」, 79p


SF 소설을 쓰며 영향을 받은 작가, 혹은 꼭 읽어봐 주셨으면 좋겠다 하는 SF 소설이 있다면 추천해주세요.


아무래도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작가는 어슐러 르 귄입니다. 지금 우리가 맞닥뜨린 수많은 문제들을 르 귄은 1960년대에 이미 예상하고 있었더라고요. 한두 권의 대표작을 읽는 것보다 전작을 연달아 읽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에요. 숨은 보물들을 찾기 좋은 방식이 아닌가 해요. 어슐러 르 귄의 전작을 읽으신 후 에세이까지 읽으시면 무척 즐거우실 것 같습니다.



▲ 어슐러 르 귄의 저작들. 왼쪽부터 차례로 어스시 전집의 『어스시의 마법사』, 서부 해안 3부작 『서부 해안 연대기』, 생애 마지막 에세이 『남겨둘 시간이 없답니다』이다.



올해만 2권의 책이 더 출간될 예정이라고 들었습니다. 어떤 책이 될지 미리 들려주실 수 있나요?


일단 한 권은 앞에서 말씀드린 장편소설이고, 그다음 권은 에세이를 쓸 예정이에요.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제 책이 자원과 에너지를 너무 많이 쓰는 게 아닌가 싶어서, 어떻게 하면 이야기를 쓰며 탄소를 덜 배출할 수 있을지 고민 중입니다.


마지막으로 인터뷰를 읽고 있을 독자들에게 자유롭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책을 읽는 사람들은 “그냥 이대로 살자” “어차피 망했다” 하고 놓아버리는 쪽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더 나은 게 없을까?” 찾는 쪽일 거라고요. 읽고 쓰고 연결되면서 함께 더 나은 세계를 계속 상상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어려운 희망에 대해 끝까지 쓰고 싶어요.





정세랑

1984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2010년 『판타스틱』에 「드림, 드림, 드림」을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2013년 『이만큼 가까이』로 창비장편소설상을, 2017년 『피프티 피플』로 한국일보문학상을 받았다. 소설집 『옥상에서 만나요』, 장편소설 『덧니가 보고 싶어』 『지구에서 한아뿐』 『재인, 재욱, 재훈』 『보건교사 안은영』이 있다.



|Editor - 임채원

chaewon418@bn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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