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의 언어』 정용실 “대화는 누군가를 잡아주는 손이어야 한다”

인디언 언어의 하나인 테와어에서 ‘귀’는 ‘주는 것’이라는 뜻이다. (91쪽)
KBS 정용실 아나운서는 무엇보다 나누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었다. 26년 차 아나운서인 그가 사는 동안 가장 많이 나눈 것은 다름 아닌 진심이었다. 550회 인터뷰를 하며 그는 누구보다 경청했고, 누구보다 ‘듣는 것’을 고민했다. 그에게 듣는 것은 그저 소리를 듣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다. 눈으로, 귀로, 마음으로 그이의 삶을 듣는 일이었다. 먼저 세상을 떠난 딸 이야기를 했던 이어령 선생 인터뷰 후 그는 사흘을 내리 울었단다. 23일 KBS 앞 어느 카페에서 만난 정용실은 이어령 선생 인터뷰를 회상하며 다시금 눈시울을 붉혔다. 한참 말을 잇지 못하는 그를 보면서
최근 출간된 『공감의 언어』는 아나운서로서 정용실의 정수가 담긴, 소통과 공감에 관한 책이다. 숱하게 귀를 내주고 마음을 내주면서 그가 찾은 행복의 비법이 책에는 담겨 있었다.
공감을 ‘은유 능력’으로 더 끌어올린다면, 우리는 더 이상 공감이 무력하게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진정한 공감’은 상대에겐 ‘치유’이고, 나에겐 ‘성장’을 가져다줄 것이기 때문이다. (159쪽)
- 1991년 KBS에 입사해 아나운서로 20여 년간 많은 분을 만나셨어요. 『공감의 언어』를 통해 ‘공감’을 말씀하신 것은 선생님이 아나운서로서 중요하게 여겨온 가치, 아나운서로서 사람을 대해온 태도와도 무관하지 않은 것 같아요. 공감에 관한 책을 집필하신 계기가 궁금합니다.
7년 전 미국에서 1년간 소통 공부를 한 일이 있었어요. 그 공부가 계기가 돼 한 월간잡지에 ‘리더의 스피치’라는 칼럼을 연재했습니다. 많은 분이 스피치는 기술의 문제라고 여기는데, 공부할수록 그것이 기술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칼럼을 쓰면서도 여러 사례를 찾고 자료를 공부했고, 칼럼의 내용을 책으로 엮어보자는 제안을 받았어요. 그때는 제가 리더가 되어 보지 않은 상태에서 경험없이 책을 내는 건 리더들에게 와 닿지 않을 것 같았어요. 이론만으로 책을 낸다는 건 무모한 일 같았죠. 그래서 ‘리더의 스피치’를 주제로 책을 내는 일은 고사하고, 관련 공부를 계속했습니다.
- 책을 내는 건 더 깊은 경험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셨군요?
칼럼은 짧은 내용이지만, 그것을 한 권의 책으로 내려면 공부를 더 해야 하고 거기에 나의 경험이 녹아 있어야 해요. 이론만으로 책을 내기에 저에겐 막연한 부분이 있었던 거예요. 독자에게 현실적으로 와 닿을 것인가 고민이 들었죠. 그래서 제 전공 분야이기도 한 커뮤니케이션 공부를 더 해보자는 결심을 하게 됐습니다.
커뮤니케이션 영역은 뇌 과학, 인지과학, 심리학, 동물사회학 등 다양한 학문 연구가 집약돼 있어요. 그래서 『공감의 언어』를 내기 전 많은 학문 연구를 검토하고 다양한 관련 서적을 읽었어요. 수년간 신간 도서의 추이 역시 검토했고요. 최근 자기계발 분야 도서 트렌드는 4년 전에는 인문이 주도했고, 이후 심리학으로 옮겨갔습니다. 키워드를 살펴보면 지난 2~3년 전부터 혼자, 고독, 외로움 등 키워드가 빈도 높게 나타나고 있어요. 외로움이 해소되지 않는 것이죠.
외로움의 본질은 단절입니다. 연결된 사람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람은 근원적으로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을 때 안정감을 느낍니다. 그걸 소속감이라 표현하고, 그 연결이 우리 인간을 생존하게 하고 진화하게 했어요. 소통과 연결은 우리 생존의 비법이고 우리 진화의 키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소통, 공감, 연대가 중요할 수밖에 없고, 그 핵심은 이전 도서에서 주목해 온 ‘기술’이 아니라고 생각해 『공감의 언어』를 집필하게 되었어요. 책 집필에서 출간까지만 3년이 소요되었지요.
- 소통의 기술을 공부하던 중 소통의 핵심은 기술이 아니라 마음, 태도의 문제에서 발원한다는 걸 발견하신 거네요.
그렇죠. 결국, 마음을 열지 못해 소통하지 못한다고 생각한 겁니다. 저는 이십여 년의 방송 생활을 통해 사람을 만나고 인터뷰한 경험이 있고 경험을 통해 발달한 직관이 있잖아요. 거기에 비추어 보았을 때 기술적인 것만으로는 좋은 관계를 이어질 수가 없다는 확신이 있었어요.
제프 콜빈 『인간은 과소평가 되었다』을 보면 4차 산업혁명으로 인간의 많은 영역을 기계가 대체하지만, 기계가 대체하지 못하는 한 가지가 있다고 이야기해요. 그것이 공감이라는 것이죠.
사람을 위하고 공감하고 그것을 통해 연대감을 느끼는 것은 인간의 본성 깊이 뿌리박힌 것이라 바뀌지 않는다고 그는 이야기해요. 그래서 공감이야말로 21세기에 가장 중요한 일이고 시간이 흐를수록 빛을 발하며 그래서 인간의 마지막 영역이라고 말하는데 거기에 많은 공감을 했어요.
말은 순간의 결정체에요. 그 순간에 느껴지는 오감의 총결정체이거든요. 그러니 굉장히 예민해야 그 오감을 다 느낄 수가 있어요. 오감을 사용해 한 인간의 깊은 곳을 이해하고 공감한다는 것은 깊은 경험이고, 그 순간에만 일어나는 일이에요. 그런 것은 대체할 수가 없죠.
- 말씀하신 대로 최근 몇 년간 ‘혼자’에 관한 책이 많이 나왔어요. 그중에는 의도적으로 관계를 단절하는 내용도 있어요.
대화에는 이중성이 있어요. 대화는 행복한 일이지만 번거롭고 신경이 쓰이는 일이기도 하죠. 무엇이나 빛이 있으면 그늘이 있고, 좋은 것이 있으면 나쁜 것도 있는데 그늘은 빼고 빛만 가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햇살 아래 서 있는데 어떻게 그늘이 없을 수가 있나요? 그렇다고 해서 그늘을 피하려고 하는 대화는 우리에게 만족감을 줄 수 없죠. 인간은 그렇게 살 수 없답니다.
- 『공감의 언어』에서 불편을 피하고 이점만 취하려는 예로 SNS를 들어주셨어요. 제 경우에는 이른바 ‘랜선 집사’ ‘랜선 이모’인데, 저 역시도 부담스러운 비용이나 책임 없이 인터넷상의 귀여운 아이들과 동물들을 보는 그런 만족만 취하고 있더라고요.
행복은 그냥 얻어지는 게 아닙니다. 힘든 것을 감내하지 않으면 삶은 행복과 멀어집니다. 관계란 때로 불편할 수 있지만 우리는 서로를 아예 버리고 홀로 살 수는 없어요. 그렇게 살 수 없다면 소통해야 하는 거죠.
- 『공감의 언어』는 아나운서로서 공기처럼 접해온 언어, 소통에 관해 풀어주셨어요. 여러 책을 쓰셨지만 『공감의 언어』는 아나운서로서 한차례 자신을 되짚어보는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싶은데, 어떠셨나요?
그렇죠. 오래 생각하고 오래 고민한 책이에요.
이야기를 ‘듣는 것’을 그저 귀를 열기만 하는 수동적인 행위로만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듣기’는 수동적인 행위가 아니다. 도리어 능동적인 행위다. 잘 듣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이야기의 내용과 감정’ 모두를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56쪽)
뒤집어 생각해보면, 사람들은 에너지를 불필요하게 소모하지 않으려고 본능적으로 건성으로 상대의 얘기를 듣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57쪽)
- 『공감의 언어』는 ‘듣기’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셨어요. 책에서 미국 대학생의 자기도취는 커지고 공감 능력은 낮아졌다는 연구 결과를 인용하셨는데, 실제로 점점 남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는 사회가 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께서 책을 통해 ‘듣기’를 강조하신 이유도 여기 있지 않을까 짐작했는데, 어떤가요?
듣기 부분은 정말 많이 생각하면서 썼어요. 정말 많은 고민을 했고요. 저는 말하는 방송과 듣는 방송 두 가지를 다 경험했는데, 듣는 역할을 할 때가 훨씬 힘들어요. 그 사람의 인생을 다 들어야 하니까. 듣기는 능동적 행위이고, 온몸으로 들으며 그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행위입니다.
서정록 작가가 쓴 『잃어버린 지혜 듣기』라는 책이 있어요. 오래전 출간된 책인데, 저는 이 책을 커뮤니케이션 서적들 한가운데 넣어 놓았습니다. 그 책은 인디언의 듣기에 대해 다루고 있는데, 인디언은 세상이 소리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한답니다. 그래서 바람 소리에 관해서도 많은 이름을 짓고 언급하죠. 자연의 소리에 귀 기울였기 때문에 인디언들은 자연과 잘 살았던 겁니다.
인디언들은 듣기 없이 말하기만 성행한다면 자기주장만 난무한 시끄러운 시대가 될 거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귀 기울여 들으면서 지혜를 취하라고 이야기하는데 그런 지혜로운 태도는 전수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 듣는 데 집중하느라 온몸이 땀에 젖기도 하고, 인터뷰에 빠져 며칠간 우실 때도 많다고요. 『공감의 언어』를 보면서 그렇게 많은 에너지를 쏟아가며 듣기를 하시는지 몰랐어요.
그렇게 마음을 다해 듣지 않는다면 인터뷰이가 제게 이야기해줄 이유가 없죠. 인생에 좋은 일만 있겠어요? 아픈 이야기를 할 때는 정말 조심스럽잖아요. 저를 믿어야 이야기를 꺼낼 수 있는데, 처음 본 사이에 어떻게 믿겠어요.
- 『공감의 언어』에 5명의 인터뷰 이야기도 실려 있어요. 그중에서 이어령 선생님 인터뷰가 기억에 남습니다. 먼저 세상을 떠난 따님에 대한 회한을 이야기하셨지요. 그런 이야기를 꺼내기 참 어려웠을 텐데요.
말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솔직하게 말씀해주셨어요. 이어령 선생님 인터뷰를 하고 사흘을 울었어요. 어찌 보면 배우와 비슷한 면이 있어요. 배우가 배역에서 빠져나오는 데 시간이 걸리듯 인터뷰어도 다른 이의 이야기를 듣고 바로 빠져나오지 못해요. 온몸으로 들었으니 그것이 내 이야기 같은 거예요.
- 자식을 앞세운다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일지 감히 상상이 가지 않아요.
가장 가슴이 아프죠. 아이라면 목 놓아 울 텐데 어른이니 고통을 참아야 하잖아요. 그분이 그걸 녹여서 한마디를 할 때 말의 행간을 이해해야 인터뷰하는 의미가 생겨요. 이 한마디를 하기 위해서 얼마나 고통을 받았을지 그리고 얼마나 마음이 아플지 그걸 이해하지 못하면 이 사람은 불쾌한 거예요. 너무 고통스러워서 꺼낸 이야기를 제가 가볍게 여긴다면 불쾌한 거죠. 저 역시 그 무게를 느껴야 그 사람도 다음 이야기를 꺼낼 수 있죠.
그날 선생님이 해주신 말들이 주옥같았고 그게 제 삶에도 영향을 주었어요. 제가 부모니까. 자식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많은 고민을 했고, 때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많이 했죠.
무엇이 진정 사랑하는 것인지 백 마디 말이 필요 없어요. 그분의 삶이 보여주고 있어요. 딸에게 다 줄 수 있는데 그중에서 가장 필요했던 건 사랑이라는 것이죠. 우리가 뭘 줄 수 있다고 착각했다는 것이죠. 그것을 너무 잘 보여준 부모와 딸의 관계였기 때문에 저는 정말 그분의 이야기가 의미 있다고 생각했어요.
부모와 자식간 사랑에 대해서 그분은 자신의 약한 점을 보여주시면서 우리에게 교훈을 주신 것이죠.
- 진심을 나누는 대화를 나누고 나면 인터뷰이에 대한 애정, 책임도 생기지요?
애정이 생기죠. 선생님이 아픈 걸 다 여셨는데 제가 인터뷰가 끝났다고 혼자 떠나버리면 선생님 홀로 덩그러니 남게 되잖아요. 그렇게 되지 않게 하는 게 중요하다고 저는 생각해요. 그 사람이 다시 정리될 때까지 커피라도 나누면서 배웅해 드리는 게 저는 최소한의 인간적인 예의라고 생각해요.
자신의 마음을 열고 자신의 고통을 스스럼없이 보여주는 건 사실 큰 용기가 필요한 거예요. 쉬운 일이 아니죠.
- 그 순간 진심이 전해지겠네요.
느껴지죠. 그런 순간이 있어요.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주변이 안 보이고, 아무것도 안 보이고 오직 그 사람만 보여요. 어느 순간 제 질문이 필요가 없게 돼요.
- 인터뷰를 하다 보면 그 사람과 연결된 느낌 또 그 사람을 통해 세상과 연결된 느낌을 받게 돼요.
맞아요. 우리가 홀로 있는 섬이 아니고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게 인터뷰가 끝나고 제가 갖는 느낌이에요. 『공감의 언어』는 그것을 표현한 거예요. 진심을 나누었을 때 우리가 서로 연결된다는 것을요.
- 550회 인터뷰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은 누구였나요?
굉장히 많죠. 그중에서 저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박정희 할머니 인터뷰였어요. 박정희 할머니는 경성여자 사범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하신 수재로, 당대 신여성이었죠. 23명의 시댁 식구들과 남편이 데려오는 환자들까지 많은 사람을 돌보며 살아오셨어요.
그 할머니의 지혜로움은 연대에서 나와요. 주변 가난한 아주머니들에게 무료로 그림을 가르치셨죠. 인터뷰를 위해 그분 집에 방문했는데 그분의 가르침을 받았던 아주머니들이 마치 딸처럼 수박을 내어오고 밥을 지으셨어요. 그분의 베풂 덕분에 많은 아주머니가 진심으로 할머니를 돌보시는 거죠. 돌아가실 때도 많은 분이 함께 해주시는 가운데 돌아가셨어요.
진짜 줄 줄 아는 사람, 거기에 감사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행복할 수 있구나 깨달았지요. 그 아주머니들이 정말 행복해 보여서 거기에서 저는 많은 감동을 받았어요.
- 박정희 할머니 삶의 태도가 『공감의 언어』에서 말하는 소통의 자세와도 연결되어 있어요.
네 맞아요. 다 연결되어 있어요. 박정희 할머니는 진심으로 공감하는 분이에요. 저도 노후에는 그처럼 더불어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줄 수 있는 것은 나눠주고요. 할머니의 삶이 제게는 모델이 되었지요.
- 『공감의 언어』는 네 번째 책(공저 제외)인데, 책을 쓰는 게 아나운서님에게 어떤 의미일지 여쭙고 싶어요.
글을 쓰는 게 치유가 돼요. 글을 쓰면서 실제 많이 울기도 하고, 저에게는 치유이자 성찰의 시간이죠.
저는 감수성이 예민한 편인데, 제가 느끼는 것들을 쌓아두기만 하면 미칠 것 같더라고요. 제 안의 이야기가 언젠가는 밖으로 나가야 해요. 몸에서 나가야 비로소 해소되는 거죠.
책이 출간되면 저와 별개의 것이 되는 거 같아요. 그래서 조금 생경한 느낌도 받아요. ‘이걸 내가 썼나?’ 하는. 글을 쓸 때 복받쳤던 감정 상태가 극복된 거죠. 그래서 가장 행복한 순간은 글을 쓰는 순간에요. 인생을 살면서 항상 감정을 절제하는데, 많은 감정을 한 번에 터뜨리는 거죠. 그 후련함 때문에 쓰는 거예요.
글 중에서도 저는 자기계발 에세이를 써왔는데,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싶고 무언가 주고 싶은 마음이 항상 기저에 깔려 있기 때문에 자기계발 에세이를 쓰는 것 같아요. 제 이야기가 공허하지 않았으면 하고 제 진심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싶어요.
- 26년 차 아나운서임에도 아직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고 공부하는 자세가 책에 담겨 있었습니다. 아나운서로서 선생님은 멈추지 않고, 적당히 만족하지 않고, 계속 발전해 나가는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혼자 다 잘했다면 공부하지 않았을 수도 있겠죠. 지금도 부족하다고 느끼니까 계속 공부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일이나 인생은 완성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인생 전체로 보면 1/3은 학교에 다니고, 1/3은 일을 하고, 1/3은 여생을 보내는 거잖아요. 그것을 1막, 2막, 3막이라고 한다면 사람들은 보통 1막이 어렵다고 생각해요. 1막은 공부를 해야 하니까 어렵고, 2막은 그보다는 수월하고, 3막은 놀면 된다고 생각하는데 저는 거꾸로 생각해요.
학교생활은 결과야 어떻든 낙오자가 없지만, 사회생활은 매듭을 잘 짓는 것이 굉장히 어려운 일이고, 3막인 여생이야말로 창의적이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영역이라 생각해요.
저는 일을 즐겁고 재미있게 하면서 거기에서 무언가 배우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3막을 잘 살고 싶은 거죠. 인생의 완결점은 죽을 때 찍는 것이기 때문에, 직장생활에도 공부하고 성장하는 일이 필요하죠. 그건 누구도 가르쳐줄 수가 없죠.
앞으로도 소통에 관한 책은 계속 집필할 생각이에요. 『공감의 언어』에서 완성된 게 아니라 이게 시작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계속 공부하고 정리할 생각입니다.

- ‘여성 아나운서’ 카테고리에서는 보여줄 수 있는 것이 많지 않던 시절도 있었는데, 26년 동안 선생님은 ‘여성 아나운서’보다 ‘한 사람의 아나운서’로서 자신의 길을 계속 걸어오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나운서로서 선생님이 걸어온 길을 돌아보자면 스스로 어떤 평가를 하시는지, 또 앞으로 갈 길은 어떻게 바라보고 계시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모르겠어요. 아나운서로서 스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좋은 시절에 방송했다고 생각해요.
아나운서라는 직업은 제가 가진 역량에서 보여줘야 해요. 가진 게 없으면 보여줄 게 없으니 역량을 쌓으려 많이 노력했고, 어느덧 50세가 되어서 후배들에게 자리를 물려줄 때가 되었어요.
훌륭한 아나운서였다는 말은 저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그냥 열심히 살아온 아나운서인 것 같아요. 다큐멘터리 분야에 뛰어들어 보았고, 시사에도 뛰어들었어요. 여자 아나운서로서 홀로 MC를 맡기도 하며 새로운 장르를 도전적으로 해왔고, 아나운서 교본을 만들기도 했어요. 제 업을 토대로 여러 책을 펴냈고요.
- 책 프로그램 MC로도 활동하셨고, 실제 책을 많이 읽는 분으로 정평이 나 있어요. 특히 서른 무렵 소설을 다시 발견한 계기를 『공감의 언어』에서 소개하셨습니다.
제가 27세에 결혼해서 애를 낳았어요. 그 당시에는 결혼하고 애를 낳은 여성에 대해 차별하던 시절이었잖아요. 저희 세대는 삶의 한 부분을 희생하지 않으면 직장에서 버틸 수 없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런데 저는 남편이 좋으니까 결혼하고 싶었고 그게 무슨 문제냐 여긴 것 같아요. 너무 단순하게 생각했죠. 사회를 잘 모르고.
당시 프로그램을 배정받지 못해서 우울했어요. 여기에 육아는 온전히 제 몫이고 여러 생각이 들던 때였어요. 그러다 우연히 헌책방에서 책을 한 권 빌린 거예요. 아기가 깨니까 긴 장편 소설은 못 읽고 단편집을 빌려 보기 시작했어요.
제가 너무 힘든 시기이다 보니까 소설이 처음으로 제 인생과 연결되는 경험을 했어요. 저보다 더 힘든 여자들의 삶이 소설 속에 있었고 ‘내가 그들의 삶을 건사해주지는 못할망정 내 감정에 빠져서 내 삶이 세상에서 가장 힘든 삶인 양 구는 게 맞지 않는다’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털고 일어날 수 있도록 소설이 제게 도화선이 되었어요. 다른 일을 시작해보려고 여성학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공부하다 보니까 다시 방송 기회가 찾아오더라고요.
사실 애를 키우면서 스트레스 푸는 방법이 뭐가 있겠어요. 영화나 음악은 아이가 깰 수 있고,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도피가 책이었어요. 그로 인해 제 삶을 회복한 거죠. 이후 방송 기회도 주어지고, 열심히 해서 방송을 계속할 수 있었어요.
그 이후 책에 대한 감사함을 잊을 수가 없었죠. 친구가 그렇게 들어줘도 감사한 거잖아요. 그런데 저는 책이 저를 그렇게 일으켜 세워주었으니, 정말 감사한 일이었어요.
작가들의 고통에서 나온 이야기들이 저에게 영감을 주고 저를 일으켜 세워 주었으니까 저는 그것을 갚아야 해요. 그래서 책과 관련된 일은 돈을 따지지 않고, 시간이 허락하는 한 적극적으로 해왔어요.
방송하면서 계속 책을 안 놓는 이유는 책에 관한 감사함인 거죠.
- 책을 통해 만난 여성의 삶과 책을 통해 얻은 공감 능력이 《주부 세상을 말하자》를 진행하는 데에도 도움이 됐을 거 같아요.
많은 도움이 되었죠. 사실 저는 평범한 삶을 살았거든요. 제가 겪어보지 못한 일을 소설 속에서 접했고, 다양한 삶의 고통을 소설을 통해 알았어요. 그래서 그 프로그램을 할 때가 가장 저다웠어요.
프로그램이 저와 연결되어 있었어요. 제가 실제 주부의 삶을 살고 있고 주부들의 고난과 그런 것을 저도 몸소 아니까요. 저도 고군분투하는 사람으로서 그 프로그램에서 주부들과 만나며 고민을 풀었죠.
- 독자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려요.
제가 살아보니 이렇게 사는 게 행복하더라 하는 걸 책에 적으려 했어요. 앞으로도 어떻게 하면 행복한지 그 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그게 제 삶의 모토이기 때문에. 『공감의 언어』에는 소통에 있어서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를 모아놓았는데, 힘이 들 때 한 번 읽어보셨으면 좋겠어요. 제가 책을 통해 일어난 것처럼 이 책이 독자분에게 도움이 되는 책이면 좋겠어요. 또 즐겁고 편하게 다가갔으면 좋겠습니다.
정용실은…
연세대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서강대 언론홍보대학원에서 미디어 교육을 전공했다. KBS 공채 아나운서로 입사하여 주로 여성 및 명사 인터뷰, 책 프로그램 MC로 이름을 알렸다. 주요 저서로 『서른, 진실하게 아름답게』, 『도시에서 행복하게 사는 법』, 『혼자 공부해서 아나운서 되기』, 『언젠가 사랑이 말을 걸면』(공저), 『아나운서 말하기 특강』(공저), 『21세기 청소년 인문학』(공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