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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서 만난 사람

『발버둥치다』 박하령 “이안류에 휩쓸리지 않으려는 청소년의 발버둥을 응원한다”


박하령의 소설을 보고 있자면 단단하게 쥔 작은 주먹이 떠오른다. 그의 소설 속 청소년들이 직면한 현실은 만만치 않지만, 그 안에서 그들은 작은 주먹을 꼭 쥐고 발버둥친다. 세상을 향해 날리는 그 작은 ‘잽’을 박하령은 따뜻한 시선으로 응원한다.
박하령은 2014년 『의자 뺏기』로 제5회 살림 청소년문학상 대상을, 『반드시 다시 돌아온다』로 2016년 제10회 블루픽션상을 수상했다. 지난 4월 그는 장애인 부모를 둔 청소년 유나의 이야기를 담은 『발버둥치다』를 펴냈다. 가족의 무게와 자기 진로를 두고 고민하는 유나의 솔직한 마음을 들여다보았고, 가족의 사랑이 아이에게 족쇄가 되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딸기향 비타민”같은 소설을 쓰는 작가, 박하령과 최근 출간된 『발버둥치다』에 관해 서면으로 이야기를 나눴다.



“창피해한다는 건 남을 의식한다는 거잖아. 그게 장애란 거지. 너 집에선 엄마, 아빠의 장애를 크게 못 느끼잖아? 그런 것처럼 네가 엄마, 아빠를 부끄러워할 때만 너희 부모님이 장애인이신 거지. 그러니까 결국 그건 네가 장애인이라는 거지. 너 자신한테 자신이 없으니까.” (박하령, 『발버둥치다』, 자음과모음, 2018. 이하 페이지 표시)




- 소설에서 아이들은 열등감을 극복하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인정하는 사람으로 성장합니다. 남의 시선에 자신을 가두지 말고, 당당하게 자신을 드러내라고 응원해 주시는 것 같았어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인정하는 것, 왜 중요한가요?
청소년기는 사회화 과정에 있어 유난히 남의 시선을 많이 의식하는 시기입니다.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에 별것도 아닌 문제를 크게 확대해석하기도 하고 그래서 열등감도 느끼고 위축되기도 하는 거죠. 하지만 자존감의 유무에 따라 그 의식의 정도는 차이가 납니다. 어려서부터 지지받고 충분한 사랑을 받으면서 자란 아이는 자존감이 강해서 타인에게 쉽게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경계를 분명히 할 줄 압니다. 반면에 부모에게 학대받거나 사랑받지 못했거나 조건화된 사랑을 받은 경우, 또 유나처럼 어려서부터 부모의 감정을 돌보느라 자신의 감정을 읽지 못한 경우는 자존감이 낮아서 남의 인정에 목말라 하거나 남들의 평가에 휩쓸리기가 쉽죠. 하지만 유나가 일련의 과정을 겪으면서 자신을 알아가고 자신을 찾아가듯이, 우리도 성장하면서 상처받은 과거의 자신을 분리하고 있는 그대로의 자기를 사랑하는 일은 해야 하는 거죠. 우리는 모두 존재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고 소중합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붙어있는 안 좋은 꼬리표를 떼어내고 있는 그대로의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일부터 해야 합니다.

가족 구성원이 각자의 건강한 독립과 경계선을 지킬 때 가족은 진정한 안식처가 된다.
- 『발버둥치다』 작가의 말 중에서-

- 『발버둥치다』, 『의자뺏기』 등 작품에서 가족 문제를 중요하게 다루셨습니다. 책을 보면서 우리가 아이를 위한다면서 일방적으로 결정하는 것들이 실제론 족쇄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작품에서 가족 문제에 특히 주목하시는 이유가 있나요?
제가 『의자뺏기』에서 말한 ‘독이 되는 배려’ 가 바로 그 개념이에요. 부모는 아이가 스스로 뿌리를 내리게 빛과 바람과 그늘을 만들어주는 사람이지, 당신들 욕심대로 잔가지를 틀어 원하는 대로 분재하듯 해서는 안 되는 거거든요. 제가 가족 문제를 끊임없이 소설의 화두로 삼는 건 모든 문제가 가족에서 비롯되기 때문이에요. 에라스무스는 “인간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라고 했는데, 만들어지는 첫 과정을 겪는 곳이 바로 가족입니다. 우리는 부모를 통해서 그들의 가치와 신념을 무조건 받아들이고 그게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살 뿐만 아니라, 모든 관계에 관한 학습도 가족을 통해서 습득하게 됩니다. 자아상이 형성되는 곳도 가족이고요. 그런데 그 가치가 잘못된 것이라면 치명적인 거죠. 가족에 의해 받은 상처는 잘 드러나지 않아요. 그래서 성인이 되어서까지도 자신이 왜 불안하고 우울한지 원인조차 모르는 사람도 많죠. 부모의 비합리적인 신념이 만들어놓은 잣대에 갇혀서 죄책감을 느끼면서 사는 사람이 의외로 많아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가족을 이성적으로 ‘거리 두기’를 하여 바라보는 객관화 작업이 필요한 거예요. 가족으로부터 건강하게 분리된 사람은 잘못된 메시지를 식별할 줄 알기 때문에 ‘가족이므로 무조건 사랑해야 한다’는 식의 강박으로 껴안고 뭉개는 일을 하지 않죠. 그게 궁극적으로는 더 바람직한 사랑이기도 한 거고요.

이사는 곧 전학을 의미한다. 어른들은 그깟 전학이 뭐 대수냐는 식이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우리에게 전학은 세상이 바뀌는 일이다. 내가 딛고 선 땅이 흔들리고 뒤집히고 그래서 한 세계가 무너지고 또 다른 세계를 구축해야 하는 일이므로 절대 간단치가 않다. (93쪽)


- 『발버둥치다』 등 작가님 소설을 보면 아이들이 친구에 느끼는 질투나 선망 같은 감정, 아이들의 사회가 생생하게 그려집니다. 성인 입장에서 청소년 화자가 되어 청소년의 세계를 그리기 위해서는 정말 많은 관찰과 노력이 필요할 것 같아요. 실제 어떠신가요?

일단, 친구에게 느끼는 질투나 선망 같은 감정은 어른이나 청소년이나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 봅니다. 다만 표현의 방식에 약간 차이가 있을 뿐이죠. 제가 청소년 세계에 대한 묘사를 잘 한다면 그건 단언컨대, 아이들한테 애정이 있어서란 생각이 들어요. 물론 청소년 작가라는 직업의식에서 비롯된 주의 깊은 관찰 때문에 아이들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부분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아이들에 대한 연민과 애정이 있기 때문에 감정이입을 하게 되는 것이고 또 감정이입을 잘 하는 건 제가 다른 사람에 비해 비교적 상상력이 풍부해서 일 겁니다. 감정이입도 결국 상상력이 하는 거니까요.

- 어휘의 문제도 여쭤보고 싶습니다. 청소년의 말은 어른과 다르기도 하고, 빠르게 바뀌기도 합니다. 청소년의 말, 단어를 구사하는 게 쉽지 않은 일인데,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어휘도 관심을 두고 보면 잘 포착됩니다. 언어라는 게 결국 그 사람의 정서를 말해주는 수단이라 청소년들의 대화를 유심히 잘 관찰하는 편이에요. 그런데도 제가 살아온 세대의 어휘를 쓰게 될 때가 있는데 일상어 부분에서는 편집과정에서 더러 수정하기도 하지만 일상어가 아닌 부분은 청소년에게 익숙하지 않은 표현이나 생소한 한자어라 할지라도 일부러 놔두는 경우도 있어요. 굳이 학습의 차원까지는 아니더라도 문학을 통해서 어휘습득을 하는 과정도 필요한 거니까요. 반드시 그 어휘여야만 표현되는 감정이 있으니까 어휘를 통해 역으로 아이들이 감정을 배우게 되는 과정을 경험하게 하고 싶어요.

- 청소년 소설을 쓰는 작가가 되어야 하겠다고 마음먹은 계기가 있었나요? 작가님이 느끼는 청소년 소설의 매력이 있다면 말씀 부탁드립니다.
한때 소그룹으로 논술을 가르친 적이 있었어요. 아이들과 사적인 대화를 많이 하면서 ‘아! 얘네들 정말 애로사항이 많구나!’ 하는 연민이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뭔가 도와줄 방법이 없을까 궁리하다가 청소년 물 작가가 되어 글로써 도움을 줘야겠다는 사명감을 느끼게 된 거죠. 견인차에 끌려가듯 동력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아이들, 부모의 욕심 때문에 무기력해져 가는 아이들을 보면서 ‘의식의 환기’를 시켜주는 이야기를 전할 생각으로 <난 삐뚤어질 테다!>란 드라마 대본을 먼저 썼어요. 아이들이 귀 기울이기엔 드라마가 더 빠른 길이니까요. 그런데 드라마의 제작 특성상 작품화가 될 만한 소재가 아닌 데다, 제가 시나리오 작가보다는 문학이 더 적합하다는 걸 깨달아서 소설로 전환하게 된 거죠.
청소년 소설의 매력은 일단 내용이 난해하지 않다는 겁니다. 문학을 위한 문학이랄까? 그런 영역이 없다는 점, 다 읽고 나서도 ‘뭐지?’ 하면서 주제를 찾으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게 제겐 큰 매력이고 또 주인공이 청소년이라 순수한 감성을 주로 다루게 되므로 쓰면서 내내 행복하다는 것 또한 큰 매력입니다. 물론 청소년 문제에도 심각하고 어둡고 힘든 부분이 없지 않지만 아무래도 음습한 주제가 적은 게 사실이니까요.

- 우리나라는 오랫동안 청소년을 교화의 대상으로 바라봤던 것 같습니다. 이런 이유로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문화코드는 감동적이거나 교훈적일 거라는 선입견도 있을 것 같아요. 청소년 소설을 쓰시면서 그런 편견을 접하실 때가 있는지, 청소년 문학에 관한 어떤 편견을 가장 깨고 싶으신지 궁금합니다.
문학은 삶을 그려내는 것이므로, 그 안에서 무엇을 얻어 가지느냐는 독자의 영역이라고 생각해요. 오히려 문학은 ‘이래야 한다’ 는 식의 표현 자체가 편견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다양한 맛이 있어야 하듯이 이런저런 부류의 문학이 구색을 갖추고 있는 거 나쁘지 않다고 봐요. 다만 전 평소에 의미와 재미가 잘 섞인 ‘딸기향 비타민’ 같은 청소년 문학을 쓰는 게 저의 모토란 말을 많이 합니다. ‘감동이나 교훈, 그런 것들이 골고루 섞여 있는 게 바람직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인데 감동의 영역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일단 재미가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청소년 문학에 대한 제일 심각한 편견은 독자가 청소년이라는 생각입니다. 독자는 청소년만이 아니라 청소년을 키우는 부모들이나 그들을 이해해야 할 어른들이어야 한다고 봅니다. 청소년의 문제는 절대로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 우리 사회에서 청소년은 독립된 한 사람으로 인정받기보다는 어른의 의사결정에 따라야 하는 미성숙한 존재란 인식이 강합니다. 작가님께서는 우리 사회가 청소년을 대하는 방법, 시선을 어떻게 보고 계시는지요?
어른들은 요즘 청소년들이 부족한 거 없이 자라서 버릇이 없네, 어쩌네 하는 이야기를 하죠. (물론 이 이야기는 어느 세대에서나 돌림노래처럼 불리는 내용이긴 하지만 말이에요. 사실 물질적인 면에서는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풍요로운 시대를 살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죠. 하지만 독립된 인격체로서의 존중은 전보다 크게 더 나아졌다고 보지 않아요. 효율을 중시하는 사회의 가치가 전보다 더 팽배하다 보니 아이들을 정상적인 속도로 성숙할 수 있게 놔두지 않는 거죠. 스스로 깨닫도록 시간을 주기보다는 빠른 효과를 얻기 위해 상명하달식의 언어로 즉각 행동하기를 강요하거나 ‘사랑 = 물질’이라는 도식으로 물질로 모든 걸 대체하기에 오히려 ‘정신적인 흙수저’가 더 많아지는 것 같단 생각이 들어요. 덩치만 큰 ‘어른아이’가 많아지거나 ‘히키코모리’ 같은 은둔형 외톨이들이 많아지는 현상이 바로 그 예라고 볼 수 있죠. 아이들이 자생력을 키울 수 있을 때까지 자기 페이스대로 성장할 수 있게 믿고 사랑하며 지켜봐 주는 게 필요합니다. 감정적인 소통을 잘 해야 사랑이 전달되는 건데 이젠 그나마도 AI를 시키겠다고 난리들이니…. 동화책 읽어주는 AI는 생각만 해도 싫습니다.

- 소설을 읽다 보니 작가님의 청소년 시절도 궁금해집니다. 작가님은 학창시절을 어떻게 보내셨나요?
인터뷰를 하다 보면 저의 청소년 시절을 묻는 말을 자주 접하는데 애석하게도 저의 학창시절은 조금 멍하고 미성숙하고 잡념이 많고 산만한 스타일이었어요. 아마도 그런 나의 일련의 기질들이 오늘의 작가가 될 수 있었던 밑거름이 아니었을까 하고 과거를 소급해서 재편집해보곤 합니다. 확실한 건, 저의 그런 어눌한 청소년 시절의 경험 때문에 청소년들에게 연민을 갖게 되고 공감도 잘 하게 되는 거란 생각이 듭니다. 사실 잘 나가기만 했던 사람은 부족해 본 경험이 없어서 확실히 그 부분에 대한 이해력은 떨어지거든요. 이상한 합리화인가요?

“비행 청소년이 어디 따로 있나? 그냥 가슴속에 불씨를 다루는 방법을 몰라서 그런 거지, 뭐…….”
(박하령, 『의자뺏기』, 살림, 2015)


- 『의자뺏기』에서 가출한 은오에게 펜션 방을 내어주는 아줌마, 『발버둥치다』에서 아무렇지 않게 유나의 존재를 받아주는 이모가 꼭 작가님의 분신처럼 느껴졌습니다. 청소년 독자들에게 섣부른 참견보다는 곁을 내주는 사람이길 작가님이 바라시는 것 아닐까 싶었어요. 실제 어떠신가요?
맞아요. 모든 관계의 시작은 ‘공감’에서 시작되는 거거든요. 일방적인 훈계는 마음을 움직이게 하지 않아요. 상명하달식의 언어구조는 지배와 복종의 관계인데 마음이 움직일 리가 없죠. 커뮤니케이션이 아니라 일방통행으로 전달하는 말, 그건 관계의 단절을 유도하는 일이 될 테니까요. 그리고 실제로 아이들은 어른들의 그럴싸한 말에서 교훈을 얻지 않아요. 어른들의 행동을 보고 배우거든요. 그러니 우리는 곁을 내주고 공감을 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그 이상은 아이들이 스스로 터득하는 거죠.

‘난 엄마를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정말로 사랑하는데…… 왜 엄마를 보면 괴롭고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걸까?’ (201쪽)

- 책 『발버둥치다』에서는 유나도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인정하고 성장했지만, 유나 엄마 역시 아이가 원치 않는 방식의 사랑을 일방적으로 쏟기보다는, 유나의 의사를 인정해 주었지요. 작가님이 생각하시는 어른의 역할이란 마냥 희생적인 사랑이 아니라, 아이가 독립된 인격체라는 것을 인정하고, 날개를 뻗을 수 있도록 북돋워 주는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는데, 실제 어떠신가요?
저는 어른은 아이들보다 단지 진도가 앞선 사람일 뿐이란 말을 즐겨 합니다. 앞서가는 사람일 뿐이니 권력이나 권위를 앞세울 이유가 없는 거죠. 다만 앞장선 성인이니까 책임과 의무로서 사랑을 주고 보호해주고 아이들이 건강한 성인으로 자라날 수 있게 도와주는 역할을 하면 되는 거지 “무조건 나를 따르라”라거나 “내 말이 맞다”라거나, “내가 희생했으니 효도해라”는 아니죠. 넘치는 사랑으로 사랑의 감옥에 아이들을 가둬 그들의 날개를 꺾지 말고 건강한 성인으로 자랄 때까지만 도와주고 “네 인생을 네 멋대로 살아보라”라고 격려해주세요.

- 독자들에게 자유롭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얼마 전에 어느 책에서 “선해지겠다거나 악해지겠다고 결심한 적이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 악행을 저지른다”란 글을 봤습니다. 즉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다들 그런다는 식의 상투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더 해롭다는 것을 말한 것인데, 제 책 제목 ‘발버둥치다’와 일맥상통하는 구절이라고 느꼈습니다. 우리 청소년들이 거대한 이안류에 휩쓸리지 않기 위한 발버둥, 즉 의지를 갖고 방향성 있게 움직이려고 노력했으면 합니다. 아무 생각 없이 거대한 틀에 맞물려서 그냥 돌려짐을 당하는 무엇이 아니라 자기 의지로 움직이려는 발버둥, 그런 발버둥치는 청소년이 되길 바랍니다. 우리는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존재니까요.

박하령은
서울에서 태어나 대학에서 사회학을 전공했다. 글을 다루는 일을 업으로 삼다가, 이 땅의 오늘을 사는 아이와 청소년들에게 위로가 되고 싶어 본격적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2010년 「난 삐뚤어질 테다!」가 ‘KBS 미니시리즈 공모전’에 당선되었고, 2014년 『의자 뺏기』로 제5회 살림 청소년 문학상 대상을 수상했다. 새로운 악마 캐릭터를 통해 선택의 의미에 대해 질문하는 청소년 장편소설 『반드시 다시 돌아온다』로 2016년 제10회 블루픽션상을 수상했다. 작가는 앞으로도 재미와 의미가 잘 어우러진 양명한 청소년소설을 쓰기 위해 계속 고민 중이다. 또 다른 작품으로 『기필코 서바이벌!』이 있다.

|Editor - 송보배
10rim@bn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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