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점에서 만난 사람] 『화가의 집』 강일구 “심플함과 소박함은 내 그림의 길이자 끝”

심플한 그림 속에 짧은 메시지와 유머를 담는 강일구, 1990년대 그는 폴란드 국제유머아트 심사위원상, 일본 요코하마 국제스포츠유머일러스트 우수상, 일본 교토 AIDS 포스터 우수상, 이탈리아 국제유머아트 비엔날레 등 각종 국제대회에서 수상하며 이름을 알렸다.
최근 출간된 책 『화가의 집』은 그의 첫 에세이집으로 그의 그림, 일상에 관한 솔직한 이야기를 담았다.
심플함과 소박함은 내 작품의 길이자 최종 도착지점이자 끝나는 곳이다. (182쪽)
지난 4월 5일 연희동의 한 카페에서그의 심플하고 소박한 그림, 그리고 삶의 이야기를 물었다.
- 『화가의 집』은 작가님의 첫 에세이집입니다. 에세이를 쓰는 것은 작가로서 또 한 사람으로서 솔직한 자신을 드러내는 일이기도 한데요. 그래서 그림을 발표하실 때와는 사뭇 소감이 다를 것 같습니다. 어떤가요?
책이 나온 게 당연히 반갑기는 한데 한편으로는 슬프기도 했어요. 아쉬움도 생기고 보완하고 싶은 마음도 생기고요.
- 왜 슬픈 마음이 들어요?
반백 년을 넘게 살다 보니까 안 보고 싶어도 슬픈 걸 보게 되잖아요. 가장 가까운 친구의 죽음, 아버지의 죽음, 친한 친구의 자살……. 겉으로는 담담한 척하지만, 안으로 상처가 쌓이더라고요.
책을 낸 게 좋아할 것도 슬퍼할 것도 아니지만 아리다고 해야 할까요? 영화를 찍고, 연극을 하는 이 모든 게 환영에 불과한 거 아닌가 싶은 때가 있어요. 개인에게는 기쁘고 행복한 일이지만, 지나고 나면 결국 놓아야 할 삶의 흔적들이고 그런 의미에서 아련하고 슬프다는 생각이 드는 거 같아요.

강일구 그림, 책 『화가의 집』 수록.
- 책을 통해서 아내와 인연도 이야기해 주셨어요. 작가님을 이해하고 따뜻하게 감싸주시는 분이란 생각이 듭니다.
제 아내에 관해서는 종교와 같은 느낌이 들어요. 아무리 부부라도 생각이 다를 수도 있고 사소한 것으로 싸울 수도 있거든요. 그렇게 부딪치는 것조차 저에게는 성찰하는 계기가 되는 것 같아요.
저도 완벽하지 않은데 제 아내도 완벽하지 않아요. 저는 예술을 핑계로 계속 벗어나고 싶고 자유롭고 싶어하는데, 아내는 저에게 현실을 이야기하고 현실의 입김을 불어주는 존재예요. 그런 과정을 통해 저를 성찰하게 하는 존재이죠.
- 아내를 붕어라 부르시고, 작가님은 상어란 별명으로 불리는데, 그 이유가 있나요?
아내가 육지에서 살 수 없는 어류 인간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나이는 많지만 숨 가쁜 경쟁 사회에서 힘들어하는, 그 모습이 수면 위에서 힘들어하는 어류 같다는 생각이 들지요.
수온이 뜨거우면 물고기가 수면 위에 올라와서 꼴깍꼴깍하는 그런 모습, 아내의 이미지에서 간혹 그런 게 보이더라고요.
저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아내를 붕어라고 부른 일이 있는데, 상당히 공감하더라고요. 아내는 반대로 저를 상어라 불러요. 제 어금니가 뾰족해서 상어를 연상케 하는 것도 있고, 제 성격도 어느 땐 잔잔하다가 어느 땐 악한 면이 나오는데 그런 모습이 상어와 연관되어 보이지 않았을까요.

강일구 그림, 책 『화가의 집』 수록.
- 연극, 영화 작업을 하셨고, 시에 관심을 두신 일도 있었지요. 어떤 정해진 분야, 정해진 틀에 얽매이지 않고 창작 에너지를 자유롭게 발현하시는 것 같아요.
연기에 관한 마음이 생겨서 오디션을 알아본 일이 있어요. 오디션을 보려면 문을 열고 들어가야 하는데 차마 열지 못하고 손잡이에서 주저주저한 게 몇 년 가더라고요.
그렇게 고민만 하다가 시간이 다 가겠다 싶어서, ‘에이, 이러려면 내가 그냥 해버리자.’ 해서 시작한 게 연극 총괄 진행이었어요. 그게 또 영화로 이어졌고요. 거창한 건 아니지만 독립 단편영화를 제작하고 있어요.
보이는 그림도 좋지만 나는 보이지 않는 내면그림을 더 좋아한다. 결국 내 그림은 보이는 대상에서 보이지 않는 내면으로 가는 단계를 거친다. 초기의 작업이 사물을 그대로 베껴 그리는 것이었다면 이제는 복잡함보다는 단순하면서도 내면을 투영해서 바라보는 감성의 촉을 지닌 작가로 그림을 그리고 싶다. 마치 음표를 느끼는 작사/작곡가처럼 내면의 심성을 만드는 작업 말이다.
- 형상보다는 그 안에 있는 핵심을 포착하려는 시각이 그림에서 보여요. 사물의 보이지 않는 면을 통찰하고, 단순한 형태로 내면 풍경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많은 고뇌가 있을 거라 짐작합니다.
초등학생 때는 그림 그리는 게 그저 좋았는데 중학교 미술부에 들어가면서 단순히 그리는 게 답답하게 느껴졌어요. 미술부에 들어가면 데생을 하기 위해 이젤 앞에 서는데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왜 석고상을 4시간 동안 앉아서 똑같이 그려야 할까? 나는 이대로 그리고 싶지 않다.’ 눈에 보이는 것, 사물의 껍데기보다 그 안에 있는 것, 그 사물의 핵심이 뭘까를 알고 싶었던 거죠.
나만큼은 외형 그대로를 따르지 말아야 하겠다 싶어서 다른 길로 가서 습작했어요. 처음에는 복잡하게 그렸지만 1년, 2년, 10년, 20년이 지나면서 그림의 형태가 점차 단순해졌어요. 10대 때는 저도 세밀화나 복잡한 걸 그리기도 하고 동경하기도 했는데 그리기는 그리되 답답하더라고요.
밖에 있는 것보다 안에 있는 걸 찾아내고 끄집어내는 일이 저에게는 희열을 느끼게 하는 일이에요.

강일구 그림, 책 『화가의 집』 수록.
- 책에서 ‘이동작업실’이라는 말이 재미있었어요. 아이디어를 기록하기 위해 어디서나 메모를 많이 하신다고요.
제 작업에서는 생각하는 게 70%이고, 작업실에서 그림 그리는 건 30%에요. 이동작업실이라는 말 그대로이죠. 떠오르는 생각을 연습장에 기록하면 나중에 작업실에서는 국수 뽑혀 나오는 것처럼 작업이 진행돼요.
만약 메모를 안 하면 생각이 날아가고 그래서 영원히 끄집어 낼 수 없는 경우도 나오잖아요.
미술 작업이란 희한해서 어떤 작품은 몇 개월을 기다려도 안 나올 수도 있고 또 어떤 그림은 30초 만에 나오기도 해요.
- 몇 개월 간 오래 작업한 그림과 순간적인 작업 중 어떤 게 더 마음에 드는 결과물이 나오나요?
확실한 것은 처음에 그렸던 게 가장 마음에 와 닿아요. 그때 그려야 했던 것들, 그때 해야만 했던 것들이 가장 잘 나오죠. 머뭇머뭇하고 미룬 그림은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아요. 마치 대입고사에서 적은 답처럼, 처음에 그린 게 80~90%의 확률로 더 마음에 들어요. 미루다가 그렸을 때는 벌써 선이 다르고 맛이 달라져요. 타이밍을 놓쳤기 때문인데 그 미세한 차이를 남은 모르지만, 제 눈에는 보이기 때문에 많이 소각하고 버리기도 했어요.

강일구 그림, 책 『화가의 집』 수록.
노랑색만 보면 고흐와 고갱이 그립고, 노랑색만 보면 따뜻한 봄이 그리웁고, 노랑색만 보면 고향과 어머니가 그리웁다. 그래서 나는 노랑색에 더욱 집착하는 듯하다. (84쪽)
- 작가님께서는 원색의 노란색을 즐겨 쓰시는데 이번 에세이집에서 그 노란색에 관해서도 말씀해주셨어요. 어떤 그리움의 감정이 색을 통해 표현되고 있는 것 같아요. 노란색을 처음 그림에 쓰셨을 때는 언제였나요? 언제 처음 그 색에 매료됐는지 궁금합니다.
대학을 재수하면서 20대에 공백기가 생겼어요. 그림을 채색하려면 많은 색이 필요한데 경제적 부담이 있었어요. 제 딴에는 계속 칠할 수 있는 색, 질리지 않고 쓸 수 있는 색, 좋아하는 색이 무엇인지 고민하기 시작했죠.
가만히 생각하니까 그게 노란색이더라고요. 저에게는 노란색이 태양의 색, 행복한 들판을 나타내는 색으로 보였어요. 그래서 색을 줄이면서 노란색을 사용했고, 노란색이 제 트레이드마크가 됐어요.
노란색은 제 안에서 행복한 색, 춥지 않은 색이에요. 겨울철에도 따뜻한 시골집의 노란 장판 같은 색이기도 하고요. 나와 맞고 질리지 않는 색이고, 나의 분신 같은 색이지요.
- 제가 작가님 그림의 노란색에서 느낀 정서는 그리움이었어요.
태어나기 이전, 삶 너머에 관한 그리움이 있지요. 삶 너머는 따뜻하고 춥지 않고 행복했으면 하는 그런 바람이 있어요. 그런 색깔, 그리움 그런 게 통합된 거죠.
그걸 그림으로 표현하다보니 노란색과 만나는 것 같아요. 태양의 노란색이 우리를 따뜻하게 하는 것처럼, 그런 온기를 계속 갈구하는 것이죠.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범위에서 그리움의 세계나 아련한 것들을 끄집어내는 작업을 하고 싶어요. 제게는 이 세계가 더 낯설고 삶 건너편의 세계가 더 낯익은 세계라 느껴질 때도 있고요.
- 태어나 접하는 삶이 고통이기 때문에 사람에게는 태어나기 이전 어머니 안에 있을 때 그 완전했던 상태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있다고 하더군요.
어릴 때 제가 물에 빠진 적이 있었어요. 옆집 형이 너무 멋지게 다이빙을 하기에 수영을 못하는데도 따라 다이빙을 하다가 사고가 났어요.
2m가 넘는 조금 깊은 웅덩이였는데, 뛰어내리자마자 발이 닿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허우적댔어요. 허우적대니까 짧은 시간 동안 많은 물을 먹게 되더라고요. 살려달라고 말하는데도 주변 사람들에게 그 소리가 들리지 않았나 봐요.
처음에는 공포가 왔어요. 아무 소리도 안 들리고 물은 많이 먹고 아무도 안 오고 무서웠죠.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 무서운 물이 따뜻하게 다가오더라고요. 방금까지 차갑고 무섭던 물이 따뜻했어요. 처음에는 누가 오줌을 쌌나 싶을 정도로. 마치 어머니 자궁에 있던 순간처럼 따뜻하고 포근해서 이제 가는가보다 체념하고 눈을 감았죠.
그때 먼저 다이빙을 했던 형이 저를 끄집어내 살렸어요. 눈을 뜨니 너무 춥고 낯설어서 왜 나를 끄집어냈느냐고 오히려 화를 낸 것 같아요.
제 그림 테마의 핵심은 그런 거 같아요. 그립고 낯설지 않은, 삶 이전이나 너머를 그리워하는 것이죠.
강일구는…
산업디자인을 전공했지만 항상 드로잉 공부를 전문적으로 해보고 싶었다. 만화를 다시 전공했고, 화면을 가득 채우기 보다 여백을 둘 수 있는 선 위주의 그림을 주로 그리고 있다. 사회력이 부족한데도 불구하고 운 좋게 한국일보, 중앙일보에서 일러스트레이터로 근무했으며, 공주대, 부산동주대학, 서울여대, 디자인정글에서 카툰과 일러스트 강의를 했다.
1995년 첫 개인전을 시작, 16년 동안 한 해도 쉬지 않고 개인전을 열었다. ‘항상 노력하고 준비하고 생각하는 삶’을 지향하며 열심히 그림만을 바라보며 살았지만 잠시 시를 쓴다고 기웃거리기도 했고, 2017년 9월에는 대학로 소극장에서 즉흥연극 〈누구라도 그러하듯이〉를 무대에 올리기도 했다. 이번에는 작가의 첫 에세이 《화가의 집》 출간과 더불어 단편영화 〈꿈 아닌 꿈〉을 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