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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인의 큐레이션 : 내 인생의 책

[100인의 큐레이션 : 내 인생의 책] #25_배경여행가 이무늬의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생활의 향기가 더해진 지금의 모습도 충분히 아름다워”


누구나 책과 영화, 드라마에 푹 빠져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좋아하는 인물이 거닐던 길과 해변, 즐겨마시던 커피. 가상의 인물이지만 왠지 그가 걸었던 길에 서면 그의 발자국이 보이는 듯하고, 그의 단골식당에 찾아가 같은 음식을 먹으면 작품 안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 든다.

이처럼 이야기의 배경에 직접 찾아가 주인공의 그림자를 따라 밟는 작가가 있다. 스스로를 '배경여행가'라고 소개하는 이무늬 작가다.

"하루키 신작 보고 출장 일정 짜셨나 봐요?"

일본 출장을 다녀온 그녀에게 직장 동료가 건넨 말 한마디가 시작이었다. 출장의 행로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의 배경 도시가 우연히 일치한 이후 그녀는 픽션 안의 장소를 찾아가는 여행을 해왔다. 그녀의 시선에 담긴 어떤 배경들은 때로 소설이나 영화를 뛰어넘어, 그 뒷이야기를 들려준다.


배경이 된 이후의 풍경
그 이면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캐나다 레이크 루이스 곁에 있는 모레인 호수
배경 여행지는 아니지만 물빛이 정말 아름다웠다.





"배경여행을 시작하는 계기가 된 책"


- 책날개의 ‘배경여행가’라는 표현이 재밌어요. 개성있고 독창적인 타이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운영하고 있는 홈페이지 제목이 원래 ‘책·영화·드라마 속 그 곳, 그 맛, 그 말’이었는데, 너무 길고 직관적이지 않아서 누군가에게 소개하기가 어렵더라고요. 그래서 제목을 관통하는 단어가 뭐가 있을까 고민하다가 붙이게 된 이름입니다. 또 ‘배경’이라는 단어와 제 이름의 이미지가 상반되는 듯한 점도 마음에 들었고요. ‘무늬’라고 하면 다채롭고 화려한, 조금 인공적인 이미지를 떠올리잖아요. 반면 ‘배경’이라고 하면 그와 반대되는 그림이 머릿속에 그려지고.


- 책, 영화, 드라마의 공간적 배경에 찾아감으로써 그 서사 너머의 이야기를 발견하시는 것 같습니다.

당연하지만 제가 소설의 주인공이 될 수 없고, 영화나 드라마 연기자가 아니니. 또 이야기가 생겨난 시점으로부터 많은 시간이 지났으니 새로운 이야기가 피어날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처음엔 작품에서 묘사된 모습 그대로 배경이 남아 있어주길 바라는 마음이 굉장히 컸습니다. 허구의 이야기를 보고 듣고 갔으면서 현실에서 그 이야기가 계속 이어지고 있길 바랐죠.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소설에 별장이 하나 등장해요. 주변에 특별히 관광지가 있지도 않고 접근성도 굉장히 안 좋아요. 어떤 사람이 넘쳐나는 돈을 달리 쓸 데가 없어 심심풀이 같은 마음으로 지은 건물인 거죠. 그렇지만 그 소설의 배경이 된 건물을 찾아가 보면, 그 안에는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살고 있어요. 엄청나게 부자가 아니기 때문에 민박집을 열어 돈을 벌어야 하고, 심지어 주변에 유명한 관광지가 하나 있어 그곳을 방문하는 관광객을 끌어오기 위해 세운 숙박업소죠. 처음 배경여행을 할 땐 이런 현실의 모습을 외면하고 싶었어요. 그냥 내가 본 이야기대로 고귀한 척을 하며 있어주길 바랐던 거예요. 그러나 배경여행이 거듭될수록 그게 얼마나 옹졸하고 터무니없는 여행자의 바람이었는지 깨달았습니다. 또 이미 생활의 향기가 더해진 지금의 모습도, 이야기도 충분히 매력적임을 느꼈고요. 요즘엔 책, 영화, 드라마의 배경이 된 이후의, 그리고 그 이면의 이야기에도 귀를 많이 기울이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 여행지에서 마냥 좋았던 부분들뿐만 아니라 불편하거나 기대와 달라 실망스러웠던 부분도 가감 없이 글에 담아주셨어요. 진솔한 여행기를 추구하시는 것 같아요.

독자로서 선호하는 글을 쓰게 되는 것 같습니다. ‘행복했다. 힐링하고 돌아왔다. 모두가 친절했다. 너무 맛있어서 입에서 사르르 녹더라. 지상 낙원이 따로 없었다.’ 이런 수식이 가득한 글을 볼 때마다 의심부터 하거든요. 사진을 보면서 ‘이 정도 날씨면 엄청 더웠을 텐데?’, ‘모든 사람이랑 이야기를 나눠본 건 아니잖아?’, ‘음식이 좀 짜 보이는데?’ 등등. 독자가 되어 내 글을 보고 의심을 하지 않아도 될 만한 글을 쓰고 싶어요.


- 함께 여행을 가는 멤버가 다양한 것 같아요. 가족들, 친구들, 일본인 친구도 있었죠.
배경여행은 그 작품을 재미있게 접한 사람이 아니라면, 혹은 혼자 신나서 앞서 걷고 있는 제 곁에 있어 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면 함께 가자고 권하기가 어려워요. 가까운 사람들과 떠나게 되는 것 같습니다. 평소 제가 어떤 작품에 빠져 있는지 알고 있고, 침까지 튀겨가며 권하는 탓에 그 책이나 영화를 본, 저의 콘텐츠를 존중해 주는 사람들이죠. 특히 좋아하는 작품이나 취향의 접점이 많은 남편은 근사한 동행이 되어 줍니다. 그런데 얼마 전 ‘부모님과 함께 하는 해외 자유여행에서 유의해야 할 점’이라는 기사를 보다가 ‘부모님은 유명한 곳을 다녀와야 모임에 나가 자랑하기도 좋고 주변 사람들로부터 인정도 받는다’는 내용이 있어서 굉장히 찔렸습니다. 저희 부모님은 저 때문에 LA에서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도 못 가보셨고, 샌프란시스코 금문교 앞에서 사진도 못 찍으셨거든요.


- 영화 <러브레터>의 촬영지 오타루에서 결혼식을 올리셨는데요. 해외에서 결혼식을 치르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을 것 같아요. 왜 굳이 영화 <러브레터>였나요?

오타루에서 결혼식을 올린 이유는 굳이 영화 <러브레터>여야 했다기보다 ‘눈 내린 홋카이도’에서 하고 싶었습니다. (눈이 내리길 너무 바란 탓에 결혼식 당일날 공항이 폐쇄될 정도로 폭설이 내려 버렸습니다만.) 물론 홋카이도에서도 오타루란 도시에서 결혼식을 올릴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눈이 내리는 오타루는 낭만적이기도 하고, 또 그곳을 배경으로 한 영화 <러브레터>도 ‘첫사랑’을 이야기하잖아요. 새로운 생활이 시작되는 ‘첫’ 걸음을 그곳에서 뗐으니, ‘처음’이라는 단어가 주는 ‘설렘’을 오래도록 간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결혼식에서 신랑과 같이 낭송한 시도 윤동주의 ‘새로운 길’이었네요.


- 일본, 미국, 지중해 등 다양한 곳을 여행하셨습니다. 작가님께서 ‘처음’으로 기억하고 있는 여행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경주여행이 생각납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였는데요. 물론 그 이전에도 부모님을 따라, 걸스카우트 같은 활동을 통해 여행을 가보긴 했지만 진정한 의미의 ‘여행’이라고 하면 5학년 겨울, 경주가 떠오릅니다. 그때 어떻게 기회가 되어서 유홍준 선생님이 꾸린 답사여행의 일원으로 경주를 가게 되었어요. 흔히 가는 불국사, 석굴암에 가지 않고, 제대로 정비가 되어 있지 않아 길이 다소 험한 산길을 걸어 올라가서 어떤 장소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엔 돌로 된 유적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는데요. 대단한 표식도 없고 울타리도 둘러 있지 않고, 집 앞에 굴러다니는 돌처럼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엄청나게 오래된 유적인 겁니다. 구체적인 위치나, 유적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토록 가치 있는 것이 버려지듯 있는 것이 신기하기도 했고, ‘이런 곳을 알게 되었다’는 소소한 희열도 처음 맛보았습니다. 그때 어렴풋이 이런 것을 ‘여행’이라 하는구나, 생각했습니다.




- 요즘은 여행을 가면 SNS에 사진으로 바로바로 올려서 기록을 남기곤 하죠. 작가님도 배경 여행을 글로 남기기에 앞서, SNS에 즉각적으로 기록하시나요? 선생님의 기록 습관이 궁금합니다.

실시간으로 SNS에 기록을 올려보는 일을 시도해본 적이 있긴 한데요. 글은 고치면 고칠수록 좋아진다는 생각이 있어서 제겐 다소 어려운 과제더라고요. 물론 공개를 많이 안 할 뿐이지 여행 중 기록은 부지런히 합니다. 현지에서 사람들과 주고받은 대화나 낯선 냄새 등 사진에 담지 못하는 것들은 글로 꼼꼼하게 적어 두는데요. 노트북이랑 연동이 수월하도록 스마트폰 메모에 남깁니다. 시간이 없어서 완전한 문장을 써두지 못할 땐, ‘저녁밥 짓는 냄새(간장 섞인)’, ‘아저씨 이곳 출신’과 같이 단어만이라도 남겨둡니다. 물론 시각적인 기록은 카메라에 담고요.


- 책에 실린 사진들마다 여행지와 시간에 대한 진한 애정이 묻어납니다. ‘무거운 카메라’(164쪽)라는 표현이 있어서 궁금했어요. 주로 어떤 카메라로 촬영하시나요?

앗, 엄살을 떨었군요. 으리으리한 장비를 들고 다닌다는 뜻은 아닙니다. DSLR 카메라를 사용하긴 하지만 엄청난 사진을 찍을 줄 아는 사람이 아니고, 또 체력이 약해서 이제까지 줄곧 보급기만 써왔습니다. 캐논 500D, 600D, 100D 순으로 쓰다가 요즘엔 800D로 찍고 있습니다. 렌즈도 가장 일반적으로 화각을 많이 담을 수 있는 18-135mm와 광각렌즈를 하나 더 들고 다니는 정도입니다. 짐 드는 것을 싫어하고, (슬프게도) 기운이 없습니다.



- 작가님께 인생의 책을 여쭙고 싶습니다.

『다정한 여행의 배경』을 읽어주신 분들께서는 예상하셨겠지만, 무라카미 하루키의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입니다. 지금 제가 ‘배경여행’이라는 것을 하며 글을 쓰고 있는 계기가 된 책이라 제게 가장 소중하고 각별한 소설입니다.




소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의 배경, 핀란드 헤멘린나
핀란드 사람들이 여름휴가로 즐겨 찾는 이곳에서 쓰쿠루는 친구 구로를 만납니다.


- 그 책은 어떻게 만나게 되셨나요?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 전에 백과사전을 만드는 회사에 다녔습니다. 국내외 취재를 꽤 많이 다녔어요. 한 번은 일본 출장을 계획해서 다녀오라는 지시를 받고,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제가 일정을 짰는데요. 보통 출장 일정을 짤 때는 아직 사전에 많이 담겨 있지 않은, 혹은 표제어는 등재되어 있으나 사진이 없는 지역을 추리는 사전작업을 해요. 우리나라에서 오랜 기간 백과사전을 만들고, 서비스한 회사다 보니 오사카나 교토, 도쿄와 같은 지역은 이미 충분히 다루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직 다뤄지지 않은 지역을 거점으로 세운 계획이 나고야에서 출발해서 일본에서 가장 큰 호수 비와호를 갔다가 하마마쓰에서 하루를 묵고, 도쿄로 올라가 국제도서전에서 시장조사를 하고 돌아오는 일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일정을 본 직장동료가 “하루키 신작을(당시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보고 다녀온 것 아니냐”라고 물었어요. 출장을 다녀오고 나서도 하루키 신작의 줄거리는커녕 신작이 나온 줄도 모르고 있어서, 소설을 읽다가 굉장히 놀랐습니다. 소설에는 다섯 명의 친구가 등장하고 그들은 나고야에서 학창 시절을 보냅니다. 주인공 다자키 쓰쿠루는 도쿄에 있는 대학에 진학합니다. 도쿄에 있는 쓰쿠루를 빼고 다른 네 명의 친구는 비와호 여행을 하기도 하고요. 피아노를 치는 시로는 하마마쓰에 가서 학원 선생님이 됩니다. 출장으로 다녀온 지명들이 소설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죠.

그리고 주인공 쓰쿠루는 순례의 마지막 여정으로 친구 구로가 살고 있는 헤멘린나에 가는데요. 그곳만 못 가본 것이 마치 홀로 색채가 없었던 (이름에 색깔이 있는 한자가 없었던) 다자키 쓰쿠루의 마음처럼 아쉬웠습니다. 그래서 휴가를 내고 핀란드 여행까지 다녀와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속 배경여행 지도를 완성시켰습니다.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의 배경, 캐나다 카나나스키스
주인공 잭과 에니스가 이곳에서 마지막으로 함께 시간을 보냅니다.


소설 『설국』의 배경, 일본 에치고유자와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란 아름다운 도입을 실제로 마주하게 됩니다.



- 책을 들고 여행지로 떠난다는 말씀이 종종 책에 나와요. 여행가방에 반드시 챙기는 물건들이 있다면 몇 가지 소개 부탁드립니다.

책 정도만 신경 써서 반드시 챙깁니다. 생필품, 카메라, 노트북 등 전자기기와 그에 따른 각종 충전기들(!)은 다들 챙기는 물건일 것 같고요. 책을 챙길 땐 오랫동안 고민합니다. 우선 비행시간이 긴 여행이면 불편한 좌석에서도 깊이 빠져들 수 있는, 쉽고 잘 읽히는 소설이나 에세이가 필요하고요. 문장이랑 풍경을 비교해보고 싶으니 목적지를 배경으로 한 책도 챙깁니다. 요즘엔 제가 책을 많이 챙겨가지 않아도 남편이 (언제 다 읽고 돌아올 생각인지 궁금할 정도로) 많은 책을 챙겨가기 때문에 빌려 읽곤 합니다.


- 다음으로 떠날 곳은 어디인가요?
멀리 가는 여행은 아직 계획하지 못했고요, 가까운 시기에 일본에 다녀올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해변의 카프카』의 배경 속으로 들어갑니다.



"이번에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해변의 카프카』의 배경 속으로 들어갑니다."




이무늬는…
책, 영화, 드라마를 보고 주인공의 모습이 지워진 배경에 들어가 보는 여행을 하고 있습니다. 백과사전 회사에 다녔습니다. 건조하고 차가운 글을 쓰고 편집하는 일을 업(業)으로 삼으니, 촉촉하고 다정한 글을 찾고 쓰는 일이 낙(樂)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IT회사에 재직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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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ditor_박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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