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자리는 내가 정할게요』 김지경 “일하는 여성의 ‘작은 성장’을 응원합니다”

사회로 나오는 순간 누구나 자신만의 자리를 갖는다. 나의 능력과 노력으로 정해진 자리는 종종 사회 안에서 나를 대변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의 노력과 무관하게 결정지어진 자리가 나를 대변한다면, 그만큼 억울한 일이 또 있을까?
여기 ‘내가 서 있을 곳은 내가 정하겠다’고 당당히 말하고, 마침내 그 자리를 쟁취해낸 여성이 있다. 뉴스는 남성이 왼쪽, 여성이 오른쪽에 선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40대 여성 앵커’로서 당당히 메인 앵커의 자리에 선 김지경 기자의 말을 ‘내 자리’를 찾는 모든 이에게 전하고 싶다. 지금 그 자리에서 있는 힘껏 버티고 있는, 보이지 않는 천장을 깨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당신에게 이 이야기가 용기와 희망이 되기를 바란다.

(사진 제공=마음산책)
반갑습니다, 김지경 작가님. 간단히 소개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기자 김지경입니다. 2005년 MBC 기자로 입사해서 그동안 사회부와 경제부, 정보과학부, 시사 프로그램인 〈후플러스〉 〈시사매거진 2580〉 등에서 일했습니다. 지금은 정치팀에서 여당 취재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10년이 훌쩍 넘는 기간 동안 기자로서 활발히 활동해오셨어요. 어쩌다 기자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하셨나요?
기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 한 건 아마 초등학생 때였던 것 같아요. TV로 보는 현장을 누비는 기자들의 모습이 너무나 멋있게 보였거든요. 시간이 흘러 보다 진지하게 미래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을 때에도, 항상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온갖 사회현상의 최전선에서 질문을 던질 수 있다는 매력에 이끌려 기자를 목표로 삼았습니다. 정말 운 좋게도 제 꿈을 이룰 수 있었어요.
기자로 일한 지는 오래되었지만, 작가로서는 『내 자리는 내가 정할게요』가 첫 책이에요. 책을 낸 소감은 어떠신가요?
일단 책을 볼 때마다 정말로 제 책이 나왔다는 게 신기하고 부끄러운 기분인데요.(웃음) 기자도 늘 글을 쓰는 사람이기에 글을 쓴다는 행위는 낯설지 않았어요. 하지만 기자로서 쓰는 글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최대한 객관적인 기록만을 남기는 ‘기사’이고, 에세이는 저 자신을 드러내며 제 이야기를 쓴다는 점에서 걱정이 많았습니다. 책을 쓰는 과정 자체가 이미 제게는 ‘힐링’의 과정이었는데, 책을 읽은 독자들의 반응을 보는 것도 예상치 못했던 즐거운 경험이었어요. 제 책의 부분 부분에서 공감해주시고, 서로 다른 감상을 들려주시고, 저마다의 의미를 찾아내 주시는 걸 보면서 또 많은 힘을 얻고 있습니다.

(사진 제공=마음산책)
지난 5월을 마지막으로 1년 3개월간 진행하던 〈뉴스투데이〉를 떠나게 되셨다고요. 지금은 어떻게 지내시나요?
‘토요일 뉴스투데이 앵커+정치팀 기자+5살 아들 엄마’의 쓰리잡에서 이제 하나가 빠지고 ‘정치팀 기자+5살 아들 엄마’의 투잡을 하고 있는 셈인데요. 이상하게 일이 줄었다는 느낌은 전혀 안 드네요!(웃음) 여전히 월화수목금 바쁜 일상에 2주에 한 번꼴로 주말 근무도 하고, 틈틈이 밤을 꼬박 새우는 야근도 하면서 바쁘게 지내고 있습니다.
1년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토요일 뉴스의 메인 앵커를 맡으셨습니다. 돌이켜봤을 때 만족스러웠던 점, 혹은 아쉬웠던 점은 무엇이었나요?
기자일 때는 제가 쓰는 기사에 대해서만 신경을 쓰게 되는데, 앵커를 하면서 뉴스 프로그램 전체의 흐름을 볼 수 있었고, 그러면서 많이 배울 수 있었습니다. 다른 기자들은 기사를 어떻게 쓰는지, 기사 작성 단계를 넘어 최종적으로 뉴스를 통해 시청자들에게 전달되는 과정도 지켜볼 수 있었죠. 그 과정에서 기자가 있는 취재 현장뿐 아니라 뉴스 프로그램을 만드는 스튜디오 현장도 생동감 넘치는, 흥미로운 일이 잔뜩 벌어지는 현장이란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좀 더 여유가 있었다면 프로그램 구성 자체에 대해서도 함께 고민을 하고 새로운 코너도 만들어보고 싶었는데, 평일에는 정치부 기자로 일하느라 바쁘다 보니 진행자의 역할에만 그쳤던 것 같아서 그 점은 좀 아쉽습니다.
기자는 기본적으로 출입처에서 취재를 하고 기사를 쓰며, 그 가운데 극히 일부가 앵커가 된다. 아나운서들은 TV와 라디오에서 교양과 예능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하는데 그중 일부가 ‘뉴스’ 프로그램을 맡으며 앵커가 된다. 상대적으로 기자는 뉴스 이해도가 높고, 아나운서들은 방송 진행자로서 이미 프로이다.
_『내 자리는 내가 정할게요』 53p
이 책을 읽고 앵커와 아나운서, 방송기자의 공통점과 차이점에 대해 처음으로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기자로서 일할 때와 앵커로서 일할 때, 무엇이 가장 다른가요?
기자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확하고 촘촘하게 사실관계를 확인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앵커는 시청자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기사의 정확한 맥락을 짚어서 전달해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죠. 예를 들어서 태풍이 한국에 들이닥쳤을 때 기자는 지금 태풍이 정확히 어디 있고 어디로 움직이는지, 또 풍속과 강우량은 어떤지 등을 방송 직전까지 확인해야 하는데, 앵커는 그렇게 확인하고 있을 시간도 없는 데다 앵커 멘트에 너무 자세한 정보를 넣으면 오히려 시청자들이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되기도 합니다. 앵커로서 진행을 해나가야 하는데 기자로 더 오래 일해 온 저는 기자 본능이 마구 올라와 처음에 적응하기가 좀 어렵기도 했어요.
예를 들어, 미중 무역 갈등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미국이 중국에 관세를 더 높인다는 기사를 보고 정확한 맥락을 짚어 전달하겠다는 생각에 ‘아니 전에도 관세를 높였는데, 기존에 올린 건 이미 실행되고 또 올리는 건가? 아니면 실행되기도 전인데 더 올린다고 공표한 건가?’ 스스로 정보를 찾아보기 시작하면 순식간에 시간을 훅 빨아들이는 개미지옥에 빠진다.
_『내 자리는 내가 정할게요』 175~176p

(사진 제공=마음산책)
“여성 앵커의 고군분투 일터 브리핑”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지만, 앵커에 대한 이야기만이 아니라 농인과 수화통역사, 우리 사회의 77사이즈에 대한 시선, 워킹맘의 고충, ‘꼰대’에 관한 고민 등 다양한 이야기가 담겼어요.
작가로서 책을 써야겠다고 생각한 게 아니라 기자로서 스튜디오에서 겪은 흥미로운 일들을 기록해야겠다는, 기자의 마음으로 글을 썼습니다. 특히 77사이즈 이야기는 제가 책을 쓰게 된 가장 중요한 계기 가운데 하나인데요. 앵커 룸에는 77사이즈 옷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코디님한테 미리 ‘저 77사이즈이니 맞는 옷을 준비해달라’고 요청까지 했는데도! 그런데도 맞는 옷이 없었다고 친구들한테 얘기했더니 ‘너무 웃기다’면서 꼭 글로 남기라는 압박이 시작됐습니다. 수화통역사 선생님도 제가 앵커 업무를 맡으면서 스튜디오 안에서 만나게 된 감사한 분이었고… 그런 식으로 하나하나 기록해나갔어요.
그렇다면 이건 싸울 일인가 지나갈 일인가……. ‘사회에서 만난’ 사랑하는 자매들과 술자리에서 나눈 얘기도 생각났다. ‘우리, 이기는 싸움을 하자.’
_『내 자리는 내가 정할게요』 40p
뉴스의 앵커는 중년 남성-젊은 여성의 조합이라는 고정관념을 깨고 40대 여성으로서 메인 앵커를 맡는 의미 있는 도전을 보여주셨습니다. 앵커 경험이 전무한 채로 통념에 반하는 제안을 설득시킨 만큼, 잘 해내야 된다는 부담감도 컸을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MBC 보도국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 때문에 그런 말을 꺼내는 게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주변의 선배, 동기, 후배들에게 의견을 구했을 때 ‘잘못된 관행을 바꾸는 좋은 일’이라면서 꼭 해내라고 응원해주었고, 토요일 아침 〈뉴스투데이〉를 담당하던 선배도 제가 이런 얘기를 믿고 꺼낼 수 있는 좋은 분이었거든요. 여자 앵커와 남자 앵커의 자리를 바꾸자는 이야기를 꺼내자 처음에는 좀 당황하신 것 같았지만, 진지하게 검토하고 결국 여-남 앵커의 자리로 바꾸는 결정을 내려주셨어요.
‘내 자리는 내가 정할게요’라는 제목 역시 책을 읽고서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남성 앵커는 왼쪽, 여성 앵커는 오른쪽이라는 고정관념에 맞서고 내 자리는 내가 정하겠다는 메시지를요. 이렇게 멋진 제목은 어떻게 정해지게 되었나요?
사실 처음에 정해둔 제목은 ‘77사이즈 아줌마의 앵커 도전기’였어요. 제가 생각하는 이 책의 주된 정체성, 그러니까 ‘77사이즈’와 ‘아줌마’가 다 들어가 있고, 앵커를 하다 겪은 일을 적은 내용이니 딱이라고 생각했는데요. 한편으로는 ‘가짜 77사이즈 논쟁’에 휩싸일지도 모른다는 걱정의 의견들이 있었습니다. 저로서는 참 억울하기도 했죠. 제가 몸무게를 줄여서 말한 것도, 키를 늘려서 속인 것도 아니고, 그저 77사이즈를 77사이즈라고 말했을 뿐인데 가짜 논쟁이라니요! 그만큼 여성의 신체 사이즈 문제가 우리 사회에서 여러 복잡한 맥락을 담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결국 다른 제목 후보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일하는 여성들의 ‘작은 성장’에 초점을 맞추면 좋겠다는 의견이 많아서 최종적인 제목은 ‘내 자리는 내가 정할게요’로 결정되었습니다.
첫째. 막가파 “야! 77!”
둘째. 온정파 “살 많이 빠진 것 같네…… 조금만 더 빼.”
셋째. 음모론파 “77 사기꾼! 진짜 77이 되도록!”
(…)
77사이즈라고 말하더라도 부디 당황하지도 거짓말이라고 구박하지도 놀리지도 말아주세요. 정말 77사이즈라서 77사이즈라고 말할 뿐입니다.
77사이즈가 뭐 어때서.
_『내 자리는 내가 정할게요』 101~106p
책에서는 ‘내겐 너무 멋진 언니들’(224p)의 이야기를 들려주셨지만, 이미 제게는 작가님 또한 너무나 멋진 언니로만 보입니다. 40대 여성 메인 앵커라는 자리를 열어 젖혀주신 지금, 앞으로 나타날 자매들을 위해 어떤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시나요?
저도 어느덧 조직에서 ‘꼰대’로 분류되는 연차에 속하고, 커다란 ‘변혁’을 얘기하기엔 이미 기성 문화에 너무 적응해 버린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최소한 제가 부당함을 느꼈던 여러 일들을 후배들이 또 겪는 일만은 막을 수 있도록 작은 징검다리가 되고 싶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후배들이 그들이 생각하는 문제점을 지적하고 변화시켜 나가려고 할 때, 제가 있는 자리에서 최대한 힘을 보태주는 믿음직한 선배가 되고 싶습니다.
작가님의 앞으로의 목표는 무엇인가요? 다시 앵커를 해보고 싶다는 욕심은 없으신가요?
일단 당분간은 정치부 기자로 열심히 일해야죠! 하루에 할 일 리스트 10개가 있으면 그중 5개만 간신히 하고 하루가 끝나는 기분이지만, 그래도 큰 구멍이 생기지는 않도록 하루하루를 성실히 채워나가고 싶습니다. 당장의 목표는 바쁜 정치부 기자의 일상에 파묻히지 말고 제가 생각하는 좋은 기사를 써나가는 겁니다. 앵커는… 감사한 기회였고 많이 배울 수 있었고 즐거운 시간이었지만, 능력 있는 선후배 기자들이 많으니까 다른 기자들에게도 도전의 기회가 돌아가면 좋겠습니다. 제 꿈은 무엇보다 현장에서 뛰는 백발의 할머니 기자가 되는 것이니까요!

김지경
MBC 기자이자 <뉴스투데이> 앵커.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했고, 대학원에서 「성소수자 미디어 재현」을 주제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사회부와 경제부를 거쳤고 시사 프로그램 <시사매거진 2580>, <후플러스> 등을 제작했다. 평일에는 정치부 기자로, 혈기 넘치는 다섯 살 아들의 엄마로 하루를 불사르고, 주말에는 아침 앵커 임무를 맡아 고군분투 해왔다.
나이 마흔에 갑자기 앵커 미션을 받았는데 여느 앵커들보다 통통한 몸 탓에 맞는 옷이 없질 않나, 특보하다 정신이 혼미해지지를 않나, 잊기 힘든 일화가 많아 글을 쓰기 시작했다. 앵커로 일하는 동안 목표는 단 하나, 적어도 40대 여성들의 앵커 진출을 막는 일만은 없도록 하자는 것. 그 다짐을 지키기 위해 뉴스 준비에 최선을 다하려 한다.
Editor - 임채원
chaewon418@bn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