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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서 만난 사람

『열두 발자국』 정재승 “세상의 모든 경계에 꽃이 핀다”



정재승은 『정재승의 과학 콘서트』, 『물리학자는 영화에서 과학을 본다』, 『정재승+진중권 크로스』 등 저서를 통해 과학의 눈으로 인간 사회를 통찰하며, 인간이라는 미지의 숲을 여행하는 설렘을 안겼다.

정재승이 오랜만에 선보이는 저서 『열두 발자국』은 지난 10년 동안 기업, 일반인을 대상으로 펼친 강연 중 가장 흥미로운 12편을 엮었다. 실제 강연을 듣는 것처럼 전해지길 바라 현장의 분위기를 생생히 담았다. “우연히 듣는 강연 하나가 누군가의 인생을 바꿀 수 있다 믿는” 까닭이다. 『열두 발자국』을 두고 정재승과 나눈 서면 인터뷰를 전한다.



“『열두 발자국』 나에게 건네는 대화 같은 책”






처음 해보는 일은 계획할 수 없습니다. 혁신은 계획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혁신은 다양한 시도를 하고 계획을 끊임없이 수정해나가는 과정에서 이루어집니다. 중요한 건 계획을 완수하는 것이 아니라 목표를 완수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목표를 완수하기 위해 계획을 끊임없이 수정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25쪽)


- 책 『열두 발자국』은 지난 10년 동안 교수님께서 하신 뇌과학 강연 중 흥미로운 강연을 묶었습니다. 높임말, 현장에서 던진 농담 등을 살려 쓰신 까닭에 기존 저서와 조금 다른 분위기가 있었어요. ‘들리는 책’이란 생각도 들었는데, 강연 형태를 살려 쓰신 까닭이 궁금합니다.

지금 우리 시대의 활자문화는 구술문화가 압도적으로 지배하고 있지요. 구술형태의 줄임말을 사용한다거나, 구술 기반의 신조어들도 대세를 이루고요. 과학 수다 부류의 책이 등장하기도 하고, 방송 프로그램이나 팟캐스트를 그대로 책으로 옮겨 놓는 등 출판 시장에서도 이러한 징후들은 뚜렷합니다. 저는 이런 구술문화가 과학 분야에서는 어떻게 기능할까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이야기를 들려주듯 즐기는 과학을 실험해보고 싶었는데, 이번 강연집에서는 강연을 옮기는 것을 넘어 강연이라는 구술 형식의 맛을 살려보려 애썼습니다. 제가 실제로 뇌과학 얘기를 들려주는 것 같다는 독자들의 반응을 보면 신기합니다.


- 부록을 제외하면 ‘열두 번째 발자국’만 칼럼니스트가 정리하신 내용이에요. ‘열두 번째 발자국’이 앞선 열한 번의 발자국과 다른 까닭이 있을까요? 또 칼 세이건 서거 20주년 기념 강연을 열두 번째에 넣은 까닭도 여쭙고 싶어요.

앞의 열한 번의 강연이 제가 일방적으로 하는 강연이라면, 열두 번째 강연은 청중의 입장에서 강연을 듣는 것을 독자가 엿보는 형식이고, 부록은 인터뷰처럼 일대일 대화이지요. 그러면서 자연스레 강연에서 대화로 연결해 보고 싶었습니다.


- 책을 통해 우리는 어떤 존재인지 독자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평소 강연 스타일인가요?

물론 학회에서는 아주 구체적인 학문적 주제에 대해 발표를 하지만, 대중강연은 뇌과학 지식을 전하는 것을 넘어 내 삶과 연결 지어 생각해볼 수 있는 강연 구성을 합니다. 지식은 내 삶과 연결이 되어 통찰과 성찰을 주었을 때 비로소 의미가 생기죠. 그것이 제가 가장 듣고 싶은 강연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제 강연을 듣기 전과 후, 제 책을 읽기 전과 후에 세상이 달리 보이는 강연 혹은 그런 책을 쓰려고 노력합니다.


- 강연 기부 행사 ‘10월의 하늘’을 진행하고 계시고, 책에 수록된 인터뷰에서 과학 강연을 듣는 문화가 공연처럼 보편화됐으면 한다는 말씀도 해주셨어요. 과학 강연에 애정을 가지고 강조하시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저도 과학자의 강연을 들으면서 어린 시절 과학자의 꿈을 키웠습니다. 작은 도시에서는 청소년들이 과학자를 만날 기회가 거의 없습니다. 과학자를 만나보지 못한 아이가 과학자를 꿈꾸기는 힘듭니다. 우연히 들은 강연 하나가 누군가의 인생을 바꾸어놓을 수도 있다는 걸 믿습니다.


- 『열두 발자국』에 실린 인터뷰에서 나와 다른 분야 사람을 만나 의외의 이야기가 나오는 즐거움을 생각한다는 말씀이 눈에 띄었습니다. 진중권, 김탁환 작가와 함께하신 저술이나 TV 프로그램 《알쓸신잡》 출연도 교수님에게 그런 즐거움을 주는 일이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어요. 어떠셨나요?

네 맞습니다. 창의적인 발상의 실마리는 늘 엉뚱한 곳에 있지요. 저는 그걸 우연히 찾는 걸 매우 즐기는 편이고요. 내 전공이 아닌, 다른 분야에 대한 존중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들의 언어를 배우고, 그들의 관점을 배우는 일은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는 것만큼이나 설레는 일입니다.


- 과학이 어렵기도 하지만, 그 내용을 대중에게 와 닿게 전달하는 건 더욱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정재승의 과학 콘서트』부터 『열두 발자국』까지, 그 어려운 일을 해내셨고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어려운 과학을 대중에게 편안하게 전하는 비결이 있나요?

개념의 본질을 정확히 이해하고,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잘 정리돼 있으면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편하게 전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과학개념의 의미를 오랫동안 성찰하고 숙고해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우리가 정말 듣고 싶은 얘기는 지식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의 맥락과 그것에 대한 통찰이니까요. 그것은 학자들과의 대화에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 대학 시절 도서관 책을 다 읽고 졸업하겠다는 포부로 많은 책을 접하셨고, 5개의 동아리 활동을 소화하셨다고요. 지금이야 통섭이 강조되는 사회이지만, 교수님께서 대학에 다닌 90년대만 해도 과학자는 한 우물을 파야 한다는 사회 관념이 있을 때였을 텐데, 다양한 책을 접하고 다양한 활동을 하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세상이 많이 바뀌어서 제가 살아남았죠. 원래는 매우 산만하고, 관심사가 넓어 한 우물을 파야 하는 시대에 적합하지 않은 인간입니다. 하지만 저는 다음 세대에게 말해주고 싶어요. 한 우물을 파야 한다면, 여러 분야의 경계에 파라고. 세상의 모든 경계에선 꽃이 핍니다. 그 꽃을 피우는 씨앗이 되시라고.


- 의사결정 신경과학 분야를 연구하고 계시지요. 우리나라 기업문화는 그리 좋은 의사결정을 하는 모델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연구자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보시나요?

추격형으로 그동안 빠르게 성장해오다 보니, 새로운 걸 도전하고 때론 실패에서 교훈을 얻어 더 나아가는 문화가 부족하죠. 지난 수십 년간은 잘 작동했지만, 최전선에 서 있는 선진국으로서는 새로운 의사결정 전략이 필요합니다.

결핍이 욕망을 만듭니다. 뭔가 부족해야 그 결핍 때문에 뭘 하고 싶다는 욕망이 생겨요. (81쪽)


- 결정 장애에 관한 내용을 보면서 육아나 교육에 있어서 결핍을 느낄 기회를 주는, 기다려 주는 태도가 우리에게 부족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의사결정을 잘하는 아이로 키우는 데 필요한 부모의 태도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오랜 인내심이 가장 필요하죠. 아이를 관찰자 시점으로 바라보고 너무 깊은 자기 동일시를 하지 않는 것. 자기 객관화의 미덕은 아이 교육에서도 필요합니다. 우리는 그저 아이들에게 많은 기회를 제시해줄 뿐, 결국 선택은 그들이 하는 거라는 걸 잊어서는 안 됩니다. 자발적인 동기 없는 어떠한 행위도 제대로 열매를 만들기 어렵습니다.


미신은 왜 우리 곁을 떠나지 않는 걸까요? 그것은 ‘통제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입니다. 미래를 내가 원하는 대로 통제하고 싶은데, 그럴 수 없을 때 불안한 마음에 미신이라도 믿게 되는 것이지요. (168쪽)


- ‘우리는 왜 미신에 빠져드는가’는 우리 사회 청년 문제, 일자리 문제를 연상시켰습니다. 취업이 어렵고 일자리의 질이 떨어지고 시장의 불확실성이 커지는데, 어려운 상황을 주도적으로 타개하고 결정해본 경험은 취약한 세대가 지금의 청년 세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대학가에 성행하는 사주카페나 타로점집이 그런 불안을 보여주는 지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해마다 청년들이 현대판 점집에 빠져든다는 기사가 나는데, 교수님은 청년들이 미신에 빠져드는 이유를 어떻게 바라보시나요?

미래에 대한 불안이 우리는 미신에 사로잡히게 만들지요. 대학입시, 취업, 결혼 등 절실히 원하는 것은 많은데 그것을 노력만으로는 얻기 힘들다고 느낄 때 우리는 미신에 의지해보게 되지요. 충분히 이해는 되지만, 결코 좋은 선택은 아니지요.


- 2장에서 미래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그중에서 블록체인에 관한 이야기 흥미로웠습니다. 우리는 과거를 기준으로 현재나 미래를 판단하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는 거 같아요. 그래서 확신할 수 없는 기술이나 ‘알 수 없음’의 상태에 대해 관대하게 보지 못한다는 생각도 드는데요. 블록체인에 관한 논의를 보면 과학자의 입장에서는 답답하거나 안타까운 점이 있을 거 같습니다. 어떠신가요?

기술은 생명체 같아서 어떠한 기술도 그것의 미래를 속단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유용한 기술로 키우기 위해서는 잡초를 뽑고 거름을 주는 사회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기술생태계를 잘 만들어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 『열두 발자국』이 독자에게 ‘오일러수가 담긴 광고판’이 되길 바란다고 말씀하셨는데, 교수님께서는 『열두 발자국』이 어떤 책인지 여쭙고 싶습니다.

책을 쓰는 동안 제 삶을 정리해 볼 수 있었고, 세상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예측해 볼 수 있었습니다. 이 책은 사실 저에게 건네는 대화 같은 것이었습니다. 또, 오랜만에 나온 새 책이라 그런지 저자로서의 즐거움을 만끽하게 해주는 책이 아닌가 싶습니다. 독자와의 설레는 만남, 책에 대한 근사한 감상평을 읽는 재미를 독자분들로부터 얻어 날마다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 현재 준비하고 있는 책이나, 앞으로 책을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소개 부탁드립니다.

다음 책도 역시나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뇌과학적인 관점에서 답을 하는 책이 될 것입니다. 앞으로도 저와의 탐험에 독자분들이 한 발자국씩 동행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재승은…

뇌를 연구하는 물리학자. KAIST에서 물리학 전공으로 학부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예일대학교 의대 정신과 연구원, 고려대학교 물리학과 연구교수, 컬럼비아대학교 의대 정신과 조교수를 거쳐, 현재 KAIST 바이오및뇌공학과 교수 및 문술미래전략대학원장으로 재직 중이다.

연구 분야는 의사결정 신경과학이며, 이를 바탕으로 정신질환 대뇌 모델링과 뇌-로봇 인터페이스 분야를 연구하고 있다. 2009년 세계경제포럼(다보스 포럼)에서 ‘차세대 글로벌 리더’로 선정되었으며, 2011년 대한민국 과학문화상을 수상했다. 매년 10월 마지막 토요일, 작은 도시 도서관에서 과학자의 강연 기부 행사 ‘10월의 하늘’을 진행하고 있다.

쓴 책으로는 『정재승의 과학 콘서트』, 『물리학자는 영화에서 과학을 본다』, 『뇌과학자는 영화에서 인간을 본다』 등이 있다. 함께 쓴 책으로 『정재승+진중권 크로스』, 『쿨하게 사과하라』(김호 공저), 『눈먼 시계공』(김탁환 공저), 『1.4킬로그램의 우주, 뇌』(정용, 김대수 공저) 등이 있다.


| Editor - 송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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