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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나는 시와 우정을 나누고 있는 것일까. 나는 시와 아주 친한 친구일까. 시와 노랫말이 겉으로 보기에 비슷해 보여도 같지 않듯이 이 경우 역시 알 수 없는 일이다. _31쪽
난 왜 ‘질 수 없다’고 생각하곤 했을까. 생은 시간의 흐름을 따라, 중력의 흐름을 따라, 상식의 흐름을 따라 흘러갈 뿐이지만 내가 살고 싶다고 생각하는, 소중하다 여기는 삶의 흐름은 그 반대일 때가 많아서였을까. _62쪽
사랑하는 타인의 자는 얼굴을 바라보며 단순히 웃기다거나, 평화로워 보인다거나 하는 것을 넘어 연민을 느끼게 되는 것은 왜일까. _72쪽
나는 아주 깊이 사랑에 빠졌다. 당연히 달리기라는 운동이 내 깊은 사랑의 주인공이었지만, 그것은 한편 확실함과의 사랑이기도 했다. 하면 할수록 나아진다는 확실함. 지난번에 1분을 뛰었으면 이번에는 2분을 뛸 수 있었다. 다음 번에는 3분을 뛸 수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적금처럼 나는 착실하게 훌륭해졌다. 그런 황홀한 기분은 처음이었다. _78쪽
복잡한 아픔 앞에서 도망치지 않고, 기어이 알아내려 하지도 않고 그저 자기 손을 내민다. 모른다는 말로 도망치는 사람과 모른다는 말로 다가가는 사람. 세계는 이렇게도 나뉜다. _96쪽
심보선 시인은 시는 두 번째 사람이 쓰는 거라고 했다. 두 번째로 슬픈 사람이 첫 번째로 슬픈 사람을 생각하며 쓰는 거라고. 나는 부드러운 가을의 밤바람을 맞으며, 맛있는 요리를 먹으며, 김완의 시를 경청했다. 그는 내 바로 앞에 앉아 있었지만 목소리는 아주 먼 곳에서, 내가 있는 곳과 다른 세계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_96~97쪽
버스 안에서 광화문을 바라볼 때, 한강에서 자전거를 탈 때, 합정역 계단을 내려가며 델리만쥬 냄새를 맡을 때, 연희동 길을 걷다가 아는 사람을 만날 때, 한산한 오후 좋아하는 작은 극장으로 향하는 그늘진 골목 위에서, 꽉 막힌 강변북로 위에서 동시에 파밧 하고 켜지는 가로등을 볼 때, 부모님이 사시는 도봉동에 갈 때마다 없어지지 않고 차분히 나와 함께 늙어가고 있는 오래된 호프집 간판을 보면서, 이 도시는 정말 아름답다고 진심으로 생각한다. _136쪽
그날 나는 무대라는 것이 뒤통수 쪽으로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쪽에서는 어쩌면 내가 초라해 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_148쪽
경청의 한계를 알면서도 넘어서려 하는 얼굴. 이해를 다 하지 못한 게 분명한데도 절대 이 대화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긴 결연함으로 반짝거리는 눈빛은 아마도 인간이 지닌 최고의 아름다움 중 하나가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_151쪽
나는 그 틈에 조용히 서서 여기까지 올라온 태도에 대해 오래 생각했다. 모든 걸 이렇게 하자. 책방도 음악도 글도, 내 나머지 인생 속에서 하고 싶은 일들을, 다 이렇게 하자. 부드럽게, 허벅지가 터지지 않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이 감각을 잊지 않으려고 눈을 오랫동안 꾹 감았다. _157쪽
초등학교를 다니면서 단 한 번도 내가 어리고 불완전한 존재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나는 충분히 세상을 알 만큼 알고 있으며 이만하면 충분히 컸다고 늘 생각했다. 학교 공부도, 애들과 노는 것도, 그러다가 다투는 것도, 맘에 드는 상대 때문에 맘을 졸이고 상대의 마음이 내 것 같지 않아 상처를 받고 하는 일들도 어리다고 해서 어설프고 가볍지 않았다. 내가 성인이 되어 경험했을 때와 다름없이 언제나 진지하고 심각했다. _161쪽
그러나 비건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위대한 일이기도 했다. 인간의 생명뿐만 아니라 동물의 생명으로까지 자기 감수성을 넓히는 일이자 스스로의 건강을 확실히 챙기는 진정한 자기애의 실천이었고, 뿐만 아니라 이 사회를 지배하는 자본주의의 그릇된 구조의 일부를 향한 몸의 정치였기 때문이었다. _180쪽
나는 사진을 찍으며 슬퍼지는 것을 느꼈다. 너무 아름다운 것을 보고 있으면 늘 엄청난 속도로 슬퍼지는 것 같다. 손해 보는 걸 싫어하는 내 약삭빠른 마음이 슬퍼하지 말고 그저 이 순간을 신나게 만끽해야 한다는 뜻을 전해온다. 만끽이라는 건 언제나 약간 울고 싶은 걸 참으면서 하는 것일까. 그럼 그건 어떤 얼굴일까. _230~231쪽
저자 : 요조
뮤지션,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