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사람

『난치의 상상력』 안희제 ‘난치의 균열 속에서 세상을 보는 방법’



사물에 대고 가까이 보면 모르지만, 떼어내 세상을 비추어 보면 모든 게 뿌옇게 보이게 만드는 유산지를 아시는지. 『난치의 상상력』을 읽는 일은 온갖 것들에 씌워져 있지만 몰랐던 유산지를 한 겹 걷어내는 일 같았다. 왜 건강하지 않은 사람도 공부하고 일할 수 있는 사회여야 하는지. 장애를 정상성의 범주로 가져오려는 장치는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코로나19 시대에 고위험군이라 불리는 기저 질환자들이 미디어에서 어떻게 지워지고 있는지. 청춘, 건강 같은 가치를 강요하는 일이 어떤 이들에게, 왜 폭력일 수 있는지…. 이처럼 『난치의 상상력』은 ‘정상’의 축에 속한 사람의 관점에서는 당연했던 가치들을 뒤흔든다. 안희제의 글을 읽은 이후 나는 안 보이던 것들을 발견하고,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들을 상상한다. 그렇게 조금 더 또렷하게 세상을 본다.


※ 『난치의 상상력』에는 전자책이나 오디오북, 점자 도서로 만들어질 때 표지의 디자인을 전달할 수 있도록 하는 표지 설명이 책 앞머리에 실려 있다. 본 인터뷰에서도 시력이 나쁘거나 시각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사진 자료를 충분히 느낄 수 있도록 저자가 작성한 사진 설명 문구를 달아두었다.




[표지 설명] 흰색 배경에 흑백으로 그려진, 약간 헝클어진 듯한 짧은 머리의 옆모습. 빛을 등진 듯 목은 밝지만 턱, 코, 목젖으로 갈수록 거칠게 음영이 생긴다. 흰색 배경에는 옆모습의 그림자가 내려있다. 이 사람의 머리에서 시작된 곡선은 왼쪽으로 반원을 그리며 한 번 올라가고, 오른쪽으로 다시 한 번 올라간다. 그 사이에 ‘난치의 상상력’이라는 제목이 세로로 적혀있고, 선이 시작되는 곳에 ‘Incurable Imagination’과 ‘안희제 지음’이 모두 세로로 적혀있다. 왼쪽 아래에는 ‘질병과 장애, 그 경계를 살아가는 청년의 한국 사회 관찰기’라는 부제가 있고, 그 아래에 짙지만 밝은 푸른색 계통의 띠지가 있다. 띠지에 적힌 글은 다음과 같다. “그의 첫 책을 늘 기다려왔다. 이 사려 깊은 이야기들이 필요한 곳까지 더 멀리 가닿기를 바란다.” 김초엽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저자) 추천!



안희제 작가님, 반갑습니다. 독자분들께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이번에 『난치의 상상력』을 쓴 안희제입니다. 5학년은 초등학교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대학교에도 있다는 걸 직접 깨닫고 있는, 휴학과 수강철회의 달인이기도 합니다.


2014년부터 갖고 살아가는 병 때문에 면역억제제를 먹느라 팬데믹 상황의 불안이나 공포가 유독 커요. 한편으로는 진단 이후 술을 거의 못 마시고 있는데, 상태가 좋을 때 가끔 아주 조금 술을 마셔요. 그럴 때마다 너무 행복한 저 자신을 보며 크론병이 아니었으면 술 마시다가 큰일 났겠다 싶어서 ‘차라리 아파서 다행’이라고 안도하는 사람이기도 하고요.



[사진 설명] 시멘트로 된 넓은 벽과 긴 턱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벽이 약간 돌출된 부분의 턱에 안희제가 다리를 꼬고 앉아 있다. 오른쪽 무릎 위에 왼쪽 다리를 올리고, 왼쪽 무릎 위에는 양손을 포개어 올린 채 화면의 오른쪽을 바라보고 비스듬히 바라보고 있다. 팔뚝 부분 끄트머리에 작은 회색 무늬가 있는 검은 티셔츠에 짙은 파란색의 청바지. 검은 신발, 가는 테의 안경, 검고 짧은 머리. 어깨와 머리 뒤쪽으로 위에서 풀이 내려와 있다. ⓒ곽할머니



책 출간 이후 약 한 달이 지났습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원래는 8월 말에 북토크도 할 예정이었고, 특히 동네 책방들에 많이 찾아가고 싶었어요. 그런데 상황이 호전되다가 다시 또 급격히 나빠져서 모든 일정을 취소하거나 비대면으로 바꿨어요. 대부분은 집에 있고, 외출도 아주 드물게 합니다.


독자분들을 대면으로 만나고 싶은데 방법이 없어서, SNS나 온라인 서점에서 서평과 리뷰를 찾아 헤매며 살고 있습니다. 집에서만 지내다 보니 거의 4년 만에 베이스를 꺼내서 안전한 취미 생활을 시작하기도 했어요. 휴학은 했지만 마감할 원고가 없는 건 아니라서 마음 편히 쉬지는 못하고, 약간의 죄책감과 자괴감을 품은 채, 넷플릭스와 왓챠, 〈비밀의 숲2〉를 아주 열심히 보고 있습니다.


장애인 언론 《비마이너》와,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에 칼럼을 연재하셨다고요. 칼럼 연재와 비교했을 때 한 권의 책을 써내는 일은 어떻게 달랐나요?


아무래도 칼럼은 분량이 짧으면 3000자에서 길어도 A4로 3~4쪽을 넘지 않기 때문에, 맥락을 충분히 설명하기보다는 현 상황을 간략히 서술하고 제 논리를 밀고 나가는 데에 중점을 두며 썼어요.


그런데 책을 쓰는 건 완전히 다른 일이었어요. 전체의 구성, 흐름을 고려해야 했고, 상충하는 표현이나 내용이 있는지 반복해서 확인해야 했죠. 원래 글이 쓰인 플랫폼에서는 어느 정도 합의가 된 내용도 책에서는 충분히 맥락을 제시하면서 제가 다시 설득해야 하기도 했어요. 이 과정이 힘들기도 했지만, 그만큼 더 많이 공부하고, 제가 무슨 글을 쓰고 있는지 조금 더 파악하는 계기도 되었어요. 제가 만나본 적 없는 수많은 이의 고민이 있었기에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고 새삼스럽게 느끼기도 했습니다.


『난치의 상상력』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난치의 상상력’이라는 제목이 품은 뜻에 대해 먼저 설명을 들려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난치의 상상력’은 ‘들어가는 말’의 마지막 문장 속 ‘난치의 균열’과 긴밀히 연결되는 제목이에요. ‘난치의 균열’은 두 가지를 뜻하는데, 하나는 ‘난치라는 상태가 이 사회에 낸 균열’이고, 다른 하나는 ‘돌이킬 수 없는 균열’, 즉 완치나 회복이 불가한 균열이에요.


이 균열을 내고, 그 균열 속에서 새로운 세상을 그리는 방법이 저에게는 ‘난치의 상상력’이에요. 저의 질병은 미래나 세상에 대한 저의 상상력을 완전히 바꿔 놓았고, 저는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어요. 동시에 건강이 아닌 난치를 기준으로 삼는 상상력이기도 하고요.


그리고 저는 독자분들의 상상력에도 작은 난치의 균열을 내고 싶었어요. 그렇게 다시 돌이킬 수 없게 변한, 난치를 기준으로 삼는 상상력으로 함께 더욱 많은 균열을 만들어나가고 싶어서, ‘난치의 상상력’이라는 제목을 지었습니다.


이 책을 계기로 더욱 많은 아픈 사람들의 목소리가 세상에 나와서, 건강한 몸만을 ‘정상’으로 여기는 건강 중심 사회에 돌이킬 수 없는 난치의 균열을 내길 바란다. (11쪽)


책의 맨 처음 부분에서 “글을 쓰면서도 계속 고민했다”고 하셨어요. 질병에 대한 고민과, 이를 글로 풀어내는 일은 작가님께 왜 필요했나요? 또는 왜 그만큼 중요하지 않은가 고민하셨나요.


아무래도 질병 없이는 이제 저의 삶을 설명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인 것 같아요. 질병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어요. 한편으로는 아픈 이야기가 너무도 사적이고 공유될 수 없거나, “그래 참 힘들었구나, 나도 힘들었는데. 얼른 나아.” 정도의 대화에서 끝나야만 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어요. 그게 너무 답답했습니다. 때로는 말을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거짓말을 하는 기분이었고...


그래서 SNS에 아픈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어요. 소위 말해 ‘징징대기’ 시작한 거죠. ‘징징댄다’는 표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질병의 경험을 말하는 건 사람들에게 별로 환영받지 못해요. 그게 부당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런 태도에 저도 이미 너무나 익숙해져서 나의 글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거죠.



[사진 설명] 책 『난치의 상상력』이 짙은 갈색의 나무 판에 왼쪽으로 살짝 기울어져 놓여 있다. 오른쪽 위에서 사선으로 들어오는 햇빛은 흰색 표지의 위쪽에 반사되어 더욱 밝다.



이번에는 책을 구성하는 과정에서의 이야기를 여쭤볼게요. 질병 경험부터 시작해, 그 병이 넓혀준 세상, 사회를 바라보는 인식론으로서의 질병, 아픈 사람들과의 연대 등 개인의 경험에서 타인과 사회로 폭을 넓혀갑니다.


동녘 출판사의 박소연 편집자님이 처음부터 목차를 정말 잘 잡아 주셨어요. 제가 쓴 글들을 거의 다 읽고 흐름을 만들어서 주셨거든요. 저는 편집자님이 실질적인 공저자라고 생각해요. 아무래도 개인적인 내용이 주가 되는 에세이가 가독성을 높이기에도 좋고, 뒤의 내용을 설득하는 토대도 될 것 같아서 그 부분을 처음에 넣으신 게 아닐까 생각했어요. 저도 그런 흐름이 좋았고요.


그렇게 제 삶을 조금 이해하고, 거기에 이입한 후에는 저의 주장들을 읽으면서 아픈 사람 혹은 질병이라는 시좌를 경험할 수 있길 바랐어요. 제가 그렇게 주장할 수밖에 없는 상황임을 이해하면서, 자신의 삶과 몸을 돌아보길 바라기도 했어요. 묻고 싶었죠. ‘지금 이 글들은 정말 당신과 아무런 관련이 없나요? 사실, 여기에는 당신의 이야기도 담겨 있지 않나요?’


저에게 이 흐름이 더욱 와닿은 건 대학교 1학년 때 들은 글쓰기 수업 때문이기도 해요. 자기소개서로 시작해서 학교와 가족을 이야기하고, 타인의 고통과 죽음이라는 주제로 마지막 글을 쓰는 수업이었어요.


‘나’에서 사회를 거쳐 ‘당신’으로 나아가는 과정은, 한 사람의 이야기를 당신에게 전달하려면 하나의 사회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듯했어요. 사회를 이야기하려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 먼저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 같기도 했고요. 이 수업의 경험이 제가 글을 쓰는 데에 정말 큰 영향을 끼친 것 같네요.


배리어프리, 장애 혐오 표현 등 책에 등장하는 다양한 주제들 중에서도 코로나19에서의 기저 질환에 대해 이야기를 조금 더 여쭙고 싶어요. “매일 ‘기저 질환자’가 죽었다”(243쪽)는 어떤 의미인지 조금 설명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기사나 뉴스에서는 이야기하지 않는 부분이지요.


코로나19 때문에 사람이 죽었다는 기사는 매일 나오고, 대부분은 사망자가 기저질환을 갖고 있었다고 쓰여 있어요. 그럼에도 사실 기저 질환이나 기저 질환자는 역설적이게도 전혀 이야기되지 않아요. 기저 질환은 죽음 혹은 위험, 기저 질환자는 사망자 혹은 확진자로만 다루어지거든요.


제 검색에 걸린 자료 중에서는 아직 특정 질병과 코로나19 사이의 관계를 제대로 밝힌 게 없었어요. 있더라도 아주 특수한 사례였죠. 오히려 기저질환으로 자주 지목되는 고혈압이나 당뇨 같은 심혈관질환 전문의들은 학회에서 심혈관질환과 코로나19 사이에 관계가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어요.


이런 혼란은 우리가 아직 ‘코로나19의 기저질환’에 관해 사실상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생각해요. 치매, 조현병 등의 정신질환도 기저질환으로 분류되었는데, 사실 이 둘의 증상 중 면역력을 직접 떨어뜨리거나 코로나19에 반응하는 건 없거든요.


수많은 매체에서 지적했듯, 문제는 환자들, 노인들, 장애인들이 지역사회에 통합되지 못한 채 열악한 환경에 고립되는 현실이에요. 그러니 기저 질환이라는 말은 어떤 사람들을 사회의 변두리로 몰아넣는 구조를 은폐하는 도구로 사용된 것이나 다름없어요. ‘기저 질환 없는 사람은 괜찮다’라며 건강한 사람들을 위로하는 도구로 소비되기도 했고요. “매일 ‘기저 질환자’가 죽었다”라는 문장은 정말 지금 당장 죽어가는 사람들을 직시하라는 의미였어요. 동시에, ‘기저 질환’ 외의 그들이 죽은 원인을 추적해야 한다는 말이기도 했고요.


“아픈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몸이 언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건강한 사람들에게는 다른 몸에서 나온 상상력을 제안하고 싶었다.”(7쪽)고요. 그렇지만 자신의 질병을, 장애를 언어로서 이야기하기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작가님께서 이야기를 처음 세상으로 꺼냈던 순간에 대해 들려주신다면요.


처음으로 ‘나와 비슷한 누군가’와 대화했다고 느낀 순간은 떠오릅니다. 학교의 장애인권동아리에 가입하면서 당시 회장과 이야기를 나눌 때였어요. 저의 몸과 관련하여 누군가와 대화하며 사실상 처음으로 느낀 동질감이었어요. 하지만 그 후에도 저는 제 질병을 이야기하기보다는 감추며 지냈어요. 제 몸이나 질병에 관한 짧은 메모는 이곳저곳에 남겼지만요. 제 몸에 대해 처음으로 쓴 긴 글은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의 서평이었어요.


그 책에 나온 이론들을 저는 잘 몰랐지만, 하룻밤에 그 책을 다 읽었어요. 펼친 후 놓을 수가 없었거든요. 질병과 장애를 겪는 누군가가 삶으로 쓴 글자들이 저에게 밀려 들어왔고, 타인의 증언 앞에서 제 이야기가 쏟아지기 시작했어요. 그 증언은 변론이기도 했기에, 이야기할 용기가 되기도 했어요. 더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순간이었습니다.




[표지 설명] 책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의 표지. 책 상단에 제목이 적혀 있고, 책 중앙에서 약간 위에 저자의 이름인 김원영이 세로로 적혀 있다. 저자 이름 위아래로는 선 끝에 둥근 점이 찍힌 선분이 그어져 있다. 색 배경은 파스텔 톤의 연한 분홍색이며, 아래에는 검은색에 가까운 짙은 갈색의 나무 바닥이 깔려 있다. 세 개의 의자 사이에 검은색 휠체어 한 대가 그려져 있다. 사계절 출판사.




‘청춘, 건강, 젊음’ 등에 대한 가치들은 한국이라는 사회가 가진 특성상 다른 문화권보다 더 짙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성과주의 사회이면서, ‘정상’이 아닌 것들은 경계하고 눈앞에서 지우려는 사회이기도 하니까요. 실제 어떤가요? 이 같은 이유로 작가님의 이야기와 같은 것들이 국내에서는 아직 활발히 논의되고 있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이런 글을 쓰면서도 여전히 생산성이 떨어지는 저 자신의 모습에 분노하고 좌절하는 모순을 경험하면서, 이 사회의 성과주의와 정상성이 얼마나 강력한지 새삼 깨닫곤 합니다.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는 나이주의, 성과주의 등이 모두 맞물리면서, 마치 젊음과 건강과 생산성이 하나의 덩어리라는 착각을 만들어내요. 지극히 자본주의적인 생산성만을 유일한 가치로 취급하면서, 거기에 반대되는 존재들을 낙인찍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저 같은 사람들의 몸은 젊음과 건강과 유능함이 하나의 덩어리가 아니라고 (세상에건, 자신에게건) 폭로해요. 그래서 이런 애매한 존재들이 때로 더 위험하기도 합니다. 지금의 규범이 ‘잘못됐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고, ‘환상이다’라고 말하니까요. 그래서 낙인을 강하게 찍기보다는 아예 없는 존재로 취급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난치의 상상력』을 어떤 분께 가장 권하고 싶은가요?


욕심을 솔직하게 밝히자면, 어떤 분이든 읽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꼭 어떤 집단을 집어야 한다면, 아픈 분들께 권하고 싶어요. 건강한 사람들에게 세상을 이해하는 다른 방식을 제안하고 싶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더 많은 아픈 사람들이 자신의 질병과 통증을 이야기하길 바라면서 쓴 책이니까요. 책이 나온 후로 검색에 걸리는 서평은 전부 다 읽었어요. 그중에서 아픈 분들이 써 주신 서평들이 유독 기억에 남아요.


“겉보기만 멀쩡한 만성질환자이지만 명랑하고 건강한 사람으로 보이려 죽어라 애쓴 지난 시간의 나를 진심으로 이해받고 큰 위로를 얻습니다. 고맙습니다.”


이 리뷰를 읽고, 이 사람에게 내 글이 닿았다는 것만으로도 책을 쓸 이유는 충분했다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아픈 사람 한 명에게라도 그것이 당신의 잘못이 아니고, 함께 더 잘 살아나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보자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보다 기쁜 일은 없을 거예요.


이 책을 읽고 더 깊은 사유를 이어가고 싶다면 어떤 책을 권하시겠어요?


아직 번역이 안 되어서 저도 절반 정도밖에 못 읽은 책이지만, 앨리슨 케이퍼(Alison Kafer)의 『Feminist, Queer, Crip』 을 추천하고 싶어요. 손상 또한 정치적인 해석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걸 저에게 처음으로 알려준 책이었거든요. 이 책은 『Curative Violence』 의 저자이자 『거부당한 몸』의 공역자 중 한 분인 김은정 선생님의 수업에서 처음 알게 되었어요. 방금 추가로 언급한 두 권도 권하지만, 여기서 유일하게 번역된 『거부당한 몸』을 가장 먼저 읽으시라고 권하고 싶어요.


페미니즘과 질병, 장애를 통합하는 사유가 놀라웠고, 자신의 질병과 다른 이들의 질병을 대하는 저자의 태도에서 정말 많은 걸 배웠거든요. 학술서적이지만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부분에서는 ‘그치, 그치!’ 하며 대화를 나누듯 읽을 수도 있었어요. 두 번 읽었는데, 읽을 때마다 새로웠습니다. 이 책에서 힘을 얻으신 후, 아직 번역되지 않은 두 권에도 (아직 2권 중 0.6권을 읽은 사람으로서) 함께 도전해보자고 제안하고 싶네요.




[표지 설명] 책 『거부당한 몸』의 표지. 부제목은 ‘장애와 질병에 대한 여성주의 철학’이고, 저자는 수전 웬델, 옮긴이는 강진영·김은정·황지성, 출판사는 그린비. 책 제목은 책 상단의 하얀 배경에 살짝 기울여져 적혀 있고, 책의 아래와 왼쪽 일부는 제목과 같이 짙은 분홍색이다. 책의 중앙에서 오른쪽 위까지는 검은 바탕인데, 여기에는 다리 두 개가 무릎 아래까지만 나와 있는 흑백의 사진이 있다. 각 다리에는 살이 눌릴 만큼 끈이 단단히 감겨 있고 엄지발가락과 새끼발가락 사이에는 검은색의 둥근 공간이 있다.




남은 2020년은 어떻게 지낼 예정이신가요?


일단은 생존입니다. 그러고 나면 조금 더 나은 일상을 꾸려 보는 거예요. 대면이든 비대면이든 독자분들과 만날 방법을 찾아내서 꼭 이야기 나누고 싶어요. 지금은 다음 책을 쓰고 있는데, 그 원고도 열심히 써 봐야죠. 학과에서 맡은 일도 성실히 하고요. 사실 읽고 싶다고 사 놓은 책들이 많은데, 그중 세 권이라도 읽는 게 목표입니다. 한두 권만 읽기에는 결제 내역이 가슴 아프니까요. 아 참, 베이스도 열심히 연습해서 Dua Lipa의 〈Don‘t start now를 완벽하게 연주하는 게 소원입니다. 2020년 안에 가능하겠죠?


마지막으로 인터뷰를 읽고 있을 분들께 한 마디 부탁드립니다.


제 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여 주셔서 감사해요. 이 인터뷰와 『난치의 상상력』이 당신에게 힘이 되거나, 충격이 되었으면 합니다. 함께 새로운 이야기를 써 나가요. 그 이야기는 새로운 세상이 될 거니까요. 우리의 이야기로, 지금 여기에 난치의 균열을!




[사진 설명] 흑백 사진. 책상에 앉아서 왼손으로 책을 펼치고 있는 안희제. 오른쪽 팔꿈치가 책상에 닿은 채로 흰색 펜을 든 오른손은 오른쪽 귀 근처에 올라가 있다. 무늬가 없는 검은색 티셔츠를 입고 안경을 썼다. 검고 짧은 머리의 고개는 책상에 놓인 책을 향해 조금 숙이고 있다. 초점에서 벗어난 배경에는 벽돌과 시멘트, 창문으로 된 건물의 일부와 화분들이 있다. ⓒ곽할머니



안희제

두 번째 수능을 준비하던 2014년 7월 만성 희귀 질환인 크론병을 진단받았다. 건강했던 과거와 아픈 현재 사이에서 방황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노들장애학궁리소에서 질병과 장애에 관한 수업을 듣고 학내 장애인권 단체에서 활동하며 장애와 질병의 경계, 그 경계를 구성하고 공고히 하는 권력을 고민하게 되었다. 대학은 경제학과로 입학했지만, 관련 공부를 이어나가고자 문화인류학을 이중 전공하고, 문화인류학과 학부-대학원 연계과정 중에 있다. 학내외에서 여러 활동에 조금씩 참여했지만, 연세대학교 장애인권동아리 ‘게르니카’의 24대 회장과 장애인권위원회 5, 6대 위원장으로 활동하며 장애인권 활동에 가장 열심히 참여했다. 2019년 2월부터 진보적 장애인 언론 《비마이너》에 〈안희제의 말 많은 경계인〉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쓰고 있다. 오로민경 작가의 전시 ‘영인과 나비’에 글과 물품들로 함께했고, 전시 연계 프로그램 ‘공감각 운동회’의 패널로 참여했다. 시민연극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로 아픈 몸들과 함께 무대에 서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의 〈아픈 몸, 무대에 서다〉 연재에 참여했다. 이외에도 여러 매체에 조금씩 글을 실었다. 아픈 사람들이 시민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꿈꾸며, 건강이 아닌 난치가 세상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사진 | 저자 제공


글 | Editor - 조은혜

zzonis@bnl.co.kr